|
남한산성 - 쥐가 숨다
21.
“숭례문을 통해 강화도로 가는 것은 이미 늦었사옵니다. 길을 돌려 수구문으로 나가 남한산성으로 가야 하옵니다.”
이미 한양 도성 숭례문 앞에는 청나라 장수 마부대가 이끄는 수백명의 청나라 기병 선발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인조는 숭례문 위에 올라 한탄을 금치 못했고 곡소리를 내며 우는 이들이 더욱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남한산성으로 간다고 해도 저들에게는 기병이 있으니 충분히 따라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인조의 말에 훈련대장 신경진이 나서 말했다.
“미력하오나 신이 막아보겠나이다. 출진을 명해 주시옵소서.”
인조는 미덥지 않은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에서 청나라의 침입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적은 이를 앞서가고 있었다. 앞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이러한 국서를 보내온 바가 있었다.
- 너희 나라가 산성을 많이 쌓았으나 내 당당히 큰 길을 따라 진군할 것이니 산성에서 나를 막을쏘냐? 너희 나라가 강화도를 믿는 모양이나 내가 조선팔도를 짓밟을 때에 조그만 섬에서 임금 노릇을 하고 싶으냐? 너희 나라의 의논을 짐작하건데, 모두가 선비이니 가히 붓을 쌓아서 나를 막을쏘냐?
이러한 편지를 받고서도 조정에서는 답서를 보내는 데만 며칠이 걸릴 지경이었다. 척화파 대신들이 청나라 군대가 내려오더라도 평안도에서 격퇴할 수 있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청나라 왕 홍타이지의 말처럼 붓을 쌓아 막는 꼴밖에는 안 되었던 셈이었다.
“전하, 허락하신다면 제가 나가 저들의 사정을 알아보고 세치 혀로 진군을 늦춰 볼까 합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인조가 돌아보니 이조판서 최명길이었다. 최명길은 ‘청국 한’이라는 말을 쓰자고 했다는 이유로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청국 한’의 호칭 문제는 인조 스스로도 입에 올린 바가 있었음에도 삼사는 최명길이 주화론을 입에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꼬투리를 잡아 스스로 한성판윤의 자리에서 물러나게끔 만든 것이었다. 최명길은 잠시 휴식기를 가진 후, 곧 이조판서로 복직된 바 있었다. 역시 관직에서 잠시 물러난 후 예조판서로 복직된 김상헌은 척화파의 수장으로서 당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판국이었다.
“그리하라.”
인조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 일을 허락하였다. 어쩌면 아까운 신하 하나를 그냥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사정이 긴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최명길은 혈혈단신으로 숭례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청나라 군영으로 가 마부대를 찾았다. 최명길은 손짓으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 뒤 마부대에게 필담(筆談: 붓으로 적어 담소를 나눔)으로 적어 내려갔다.
‘왜 군사를 휘몰아 조선에 왔는가?’
마부대는 즉시 답을 적어 내려갔다.
‘너희 나라가 맹세를 어기고 적대하므로 화친을 위해서 왔노라.’
‘맹세를 어긴 것은 그대들이다. 화친을 위해 왔으면서 조선땅에 군사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 도리인가?’
‘도리는 너희 나라가 어기지 않았느냐? 거짓으로 화친을 하고 우리의 뒤를 쳤으며 백성들을 잡아들여 명나라에 바치는 경우가 어찌 있다는 것이냐?’
마부대가 따지는 말은 조선 땅으로 도망해온 여진족들을 잡아 명나라에 보낸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침입을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말이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조선이 청에 대해 오랑캐라며 은근히 멸시와 조롱을 했다는 점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최명길의 필담이 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응당 국서를 보내어 이를 따질 것이지 군사를 데리고 올 일이 아니다.’
‘용골대가 국서를 가지고 올 때마다 조선의 임금은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았다.’
‘핑계가 아니라 진실로 몸이 불편해서인데 어찌 속단하는가?’
최명길이 이렇게 마부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동안 인조의 어가는 초경(初更: 저녁 7시~ 9시 사이)을 넘어서서야 남한산성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산성의 병사들은 어가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놀라 분주히 이곳저곳을 정비하려 뛰어다녔고 남한산성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수어사 이시백은 성문 앞에 엎드려 어가를 맞이했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