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금강산 수학여행 및 체험활동이 최근 보편화되면서 급하게 지은 것 같았습니다. 바닥은 따뜻했으나 새벽의 방안 공기는 꽤 차가웠습니다. 정부에서 경비의 대부분을 부담한 체험 활동이었기 망정이지, 자신의 경비로 이곳에 왔더라면 불만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숙소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고, 밖에 공동 화장실 및 샤워장이 있는 구조였습니다. 겨울이어서 아침이면 몇 십 미터 떨어진 샤워장과 화장실을 이용하기가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요즘 학교에서 수련활동을 하는 수련장에도 대부분 실내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금강산에 이런 70∼80년대식 숙소 시설이라니….
아무리 학생들의 단체 숙소로 이용된다고 하나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되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수준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나요? 어떤 분은 북한에 왔으니 북한 체험 프로그램이 아니겠느냐며 자위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가까이에 금강산 온천이 있어서 비교적 쉽게 온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도 온천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온천은 오후에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이곳의 숙소는 다른 호텔과는 그야말로 격차를 느끼게 하는 시설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의 레저 사업부문은 앞으로 좀 더 기획력과 전문성을 제고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온정각에서의 달러 사용 문제 등을 비롯해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금강산의 음기를 막는 남근석
여행 중에는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게 많습니다. 물론 사전 준비를 충분히 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낯선 곳이라 지나치기 쉽습니다. 이곳 숙소 근처에도 의외의 볼거리가 가까이 있었습니다.
온천 빌리지 앞의 바위 봉우리가 아무래도 범상치 않아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매바위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매가 앉아 두리번거리는 모양이어서 매바위라 한다는데 아무리 보아도 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방향인 온정각에서 바라보니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특히 저의 관심을 끈 매바위산의 남근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둘째 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평소 성신앙에 관심이 많아 남한의 여러 남근석을 찾아 본 적이 있는 저로서는 하마터면 이 소중한 볼거리를 놓칠 뻔 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남근석은 주로 전라도 지역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대체로 인공적으로 깎아 만든 것이 많습니다. 아들 낳기를 바라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마을 앞에 세워둔 경우가 많지요.
남근석은 우리 나라 성신앙의 유산입니다.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마을 앞의 남근석이 민망스럽다 하여 파묻은 경우도 많아 지금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대부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중요한 관광 자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곳 매바위 남근석에 얽힌 사연은 매바위 전설이라고 하여 화장실 안에 그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남근석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화장실에서 글을 읽는 것이 익숙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만, 그 내용은 금강산이 음기가 강한 산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남근석을 내려주어 금강산의 음기를 누르고자 했다는 내용으로 기억이 됩니다. 금강산의 음기를 막기 위해 남근석을 내려주었다는 설정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물론 만들어진 설화이겠지만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이 남근석은 하늘이 내려주어서인지 매끈한 모습이 실제와 많이 닮았습니다. 이렇게 잘생긴 남근석은 처음 보았습니다.
지형이나 지세 또는 다른 이유에 의해 강해진 음기를 막기 위한 노력은 우리나라에서 종종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원 지리산의 여근바위는 음기가 강해서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돌로 성을 쌓아 음기를 막고 있습니다. 서울의 북대문이었던 숙정문도 음기를 막기 위해 늘 닫아 두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음기를 막기 위한 가장 탁월한 선택은 역시 남근석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근의 음기는 남근으로 누른다’는 발상입니다.
김제의 귀신사도 그곳 지형이 개의 성기를 닮은 구순혈이라 하여 음기가 강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남근석을 세워 두었죠. 금강산의 남근석도 역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금강산 남근석의 소식을 들은 왜군 장수가 아들을 낳기 위해 이를 훔쳐가려 했다고 합니다. 매바위산의 장군석, 두꺼비바위, 여우바위는 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장군석은 찾기가 어려웠고 두꺼비바위와 여우바위는 제 눈으로 보기에도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우리 전래의 성신앙 유산을 이곳에서 또 하나 발견했으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혹시 금강산 남근석의 양기를 받아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금강산 관광을 온 사람들이 대부분 들르는 곳이 금강산 온천입니다. 이곳에 오면 다른 것은 몰라도 꼭 흥미롭게 찾아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남근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한 흥밋거리이기보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성신앙 유산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남근석 정기 받아 아들 낳은 이야기
1996년 9월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동료 교사들과 전라도 일대의 남근석을 찾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정읍, 남원, 순창, 김제, 임실의 남근석과 여근바위 찾아 우리 전래의 성신앙을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막상 남근석과 여근바위 앞에 서자 모두들 겸손해졌습니다. 아들 낳기를 바라고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행도 각각의 처지에 따라 기원을 하기도 하고 간단히 바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술을 올리고 절을 하기도 했었지요. 남·여근석의 정기를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 기원했던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듬해 5월, 같이 답사했던 총각 두 명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혼남 세 명은 답사 후 아이를 가져 각각 아들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이 세 아이 중 두 아이는 하루 차이로 그리고 한 아이는 며칠 뒤에 태어났습니다. 즉 1996년 9월에 답사를 한 후, 이듬해인 1997년 5월 두 총각이 결혼했고, 곧이어 1997년 7월에 세 아이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 중 한 아이가 저의 둘째 아들입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실제의 일입니다. 나이 드신 한 분을 포함 모두 여섯 명이 답사에 참여하여, 나름대로 기원했던 사람들은 모두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죠.
지금도 남근석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할 때면 어김없이 빠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답사했던 사람들은 정말 남근석의 정기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저에게 금강산 남근석은 더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와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여섯번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