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얼다 만 마을 앞 활뫼저수지
ⓒ 박종인
좀 춥다. 좀체 얼지 않던 마을 앞의 저수지가 얼었다. 내가 내려갔을 땐 날이 어느 정도 풀려 수면의 반 가량만 살얼음이고 나머진 시린 잔물결이 울렁거렸다. 조카는 연신 춥다며 얼른 들어가자고 보채지만 난 얼다 만 저수지를 한참 더 바라보았다.

조카는 진짜 추운 것이 어떤 것인을 잘 모른다. 겨울치곤 이 정도는 추위도 아니지. 어설프게 얼다 만 저 저수지가 말해주지 않는가! 올 겨울에 조카는 딱 한 번 언 저수지 위를 걸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조카만한 시절에는 언 저수지를 마당 삼아 마냥 놀았었지.

▲ 이번 설날에 이 무쇠난로 위에 고구마를 구워먹었다.
ⓒ 박종인
지금도 겨울에 장갑을 끼지 않는다. 그때처럼 장갑이 없어서가 아니다. 손을 호호 불며 시린 귀를 막지 않아도 견딜만한 겨울이기 때문이다. 고추도 매워야 제 맛인데 덜 추운 겨울은 어쩐지 밋밋하니 싱겁다. 마당에서 세수하고 방문을 열라치면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추웠던 그 시절의 겨울, 하지만 세상은 그만큼 따뜻함이 가득했다.

내 겨드랑이, 엄마의 목덜미, 토방의 아랫목, 이글거리는 난로가 문득 그립다. 저번엔 없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무쇠난로가 예배당 현관에 자리하고 있다. 난로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불을 쬐던 초등학교 친구들이 떠오른다. 난로 위에 식은 도시락을 올려놓고 젖은 발을 말리다가 양말에 구멍을 내곤 했지.

큰형은 10년 전 다시 고향에 둥지를 틀었다. 날은 춥지만 마음이 따뜻했고, 번번한 먹거리가 없어 늘상 주렸지만 포근한 인심에 배불렀던 그 시골. 형은 그런 시골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도시에서 잠시 생활하다 다시 고향은 찾은 큰형은 시골다움을 간직하려 애면글면 애쓰고 있다.

형은 흙과 돌과 나무로 살림집을 짓고 예배당도 지었다. 거드는 사람도 없어 초등학생인 큰 조카의 손을 빌리기도 했고, 자재가 떨어지면 돈이 생길 때까지 마냥 미루다보니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완성된 흙살림집과 흙예배당.

달포면 뚝딱 완성되는 현대식 집에 비하면 얼마나 더딘가? 헌데 흙집은 이렇게 굼뜨게 지어야 한단다. 밑에 쌓은 흙이 채 굳기 전에 바로 흙을 쌓으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진단다.

▲ 궁산교회, 큰형이 손수 틈틈이 지은 흙예배당
ⓒ 박종인
형은 살림집을 지으면서 방 하나는 부러 구들을 놓아 온돌방을 만들었다. 마을 뒷산에서 나무를 해와 온돌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힘든 노동이라기보다는 고단한 몸을 불기운에 녹이는 쉼이다. 이글거리는 불을 다소곳이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그렇게 차분하고 편안하다는 것이다.

난 고향에 내려오면 이 온돌방에서 잠을 잔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동생을 생각하며 군불을 지피는 형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바람벽의 작은 틈새로 연기가 스며들곤 한다. 난 그 냄새가 참 좋다. 이 냄새를 맡으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이 생각난다. 지금은 이미 허물어져 집터는 밭이 되어버렸지만 그 허름한 흙집이 나에게 우주였고 별나라였다.

흙내와 나무내가 섞인 시골집 구들내. 내 몸속 틈틈이 배도록 흠씬 들이켜본다. 도시의 매연과는 감히 견줄 수 없다. 방바닥이 살짝 그슬린 온돌방 아랫목은 겨울밤의 천국, 난 천국 가러 시골간다.

덧붙이는 글 | 고향인 전북 고창, 부모님과 큰형네가 사는 고향에 가는 것은 여행을 가듯 그렇게 뜸하고 설렌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