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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야 할 역사와 잊어서는 안 될 역사가 있다. 이제는 긴 시간의 뒤안에 묻혀 갈 것 같은 지난 시간의 기억들도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채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역사적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어 우리 곁에 맴돌고 있는 그 영령들의 한을 푸는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의 일이기도 하다.

▲ 당시 광산 개발로 아직도 바위가 드러난 채 있는 옥매산
ⓒ 정윤섭
좁은 해협 앞으로 코 앞에 진도가 보이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삼호마을 옥매산(177m). 해남과 진도의 해협 사이를 흐르는 바다는 때론 급류로 요란하지만 때론 바다의 흐름조차 느끼기 힘들 정도로 고요하다.

이 옥매산에서 내려다보면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이 이루어졌던 울돌목이 눈앞이다. 또한 바로 산 아래에는 명량대첩에서 죽은 왜적의 피가 바다를 이루어 피섬이 되었다는 혈도(血島)가 이제는 육지가 되어 자리 잡고 있다.

바다 너머 진도와 서남해 바다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옥매산. 임진왜란 때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싸움에서 죽기로 일어선 민병들이 적을 속이기 위해 강강술래를 했다는 곳이다.

울돌목 해협이 눈앞에 보이는 그 역사의 현장 옥매산은 한 맺힌 사건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있는 통로가 없어 일제하 잔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어쩔 수 없는 사건쯤으로 여겨져 그냥 세월의 뒤안에 묻혀 가고 있다.

1945년 해방되던 해. 이곳 옥매산 광산에서 일하다 강제로 제주도에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던 노무자 120여명이 고향을 지척에 두고 차디찬 바다 위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만 사건이다.

해남군 황산면과 문내면의 경계지점에 있는 옥매산은 일제 때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옥(명반석)을 채굴하던 광산이었다. 이곳에서 채굴된 옥을 가공하여 만드는 옥석공예는 인근 옥년마을의 주요 수입원이자 해남의 특산품이 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도로 양편에는 지금도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옥석공예품을 파는 상점들이 남아 있지만 이제는 외국에서 들어온 값싼 옥석으로 인해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 주로 옥을 가공하며 살았던 옥년마을 거리
ⓒ 정윤섭
옥매산 광산은 일본의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淺田化學工業株式會社)에서 개발 운영한 광산으로, 당시 이 광산에서 일하던 노무자들이 1945년 4월 제주도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청산도 앞 바다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나 120여명이 수장됐다.

이러한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증명해 주는 듯 이곳 옥매산 앞 부두에는 당시 일제가 옥매산에서 채굴한 명반석을 파쇄하여 가져가기 위해 지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해방되기 약 3년 전부터 짓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해방되던 무렵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채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명반석에는 알루미늄 성분이 들어 있어 비행기 등 고급 전략물자의 원료로 사용하였다는데 옥매산 명반석을 대량으로 채굴하여 가져가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구멍이 뚫리고 포탄을 맞은 흔적들이 콘크리트 벽면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 옥을 파쇄하려고 짓던 공장 건물
ⓒ 정윤섭
옥매산 광산 노동자 200여명 강제로 끌려가

옥매산 광산 노무자 수몰사건은 1945년 4월 무렵으로 올라간다. 당시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 이들도 이제 대부분 사망한 상태이다. 그때 돌아왔던 옥매산 아래 원문마을 박복규씨와 박종철씨도 약 10여년 전과 5년 전에 각각 돌아가셨다.

지금은 아버지 박복규씨를 통해 당시를 기억하는 박장식(65)씨와, 당시 운 좋게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지 않아 살아남은 신흥마을 박종식(81)씨가 당시를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지않아 살아남은 박종식씨
ⓒ 정윤섭
박종식씨는 자신이 제주도로 끌려가지 않은 대신 아버지(박재규, 당시 50세)가 제주도에 갔다 돌아오는 도중 희생을 당하고 형도 강제로 징집되어 나가는 등 일제하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하다.

박종식씨는 당시 17세부터 19세까지 이곳 옥매산 광산에서 광석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세부터 해방되던 21세까지는 이곳 옥매산 감시초소 반공호에서 근무하게 되어 제주도로 가는 배는 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당시 일본 천전(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 옥매광산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4월 무렵 일본 무장군인 1개 소대병력이 옥매광산 부두에 미리 선박을 정박해 놓고 광산에 올라와 광산 인부 약 200여명을 포위하여 강제로 하산시켜 배에 승선시킨 다음 제주도 모슬포항으로 데려갔습니다."

박종식씨는 희미해져 가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 1945년 4월 이날도 어김없이 일터로 나온 옥매산 광산 노무자들은 각 작업장에서 정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당시 옥매산 광산에는 성수기에 1200여명 가량이 종사할 정도로 많은 노무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인근 옥매산 부근의 신흥, 원문, 삼호, 옥동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일했다고 한다.

▲ 옥을 파쇄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 내부
ⓒ 정윤섭
이들은 이날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져 영문도 모른 채 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선창으로 끌려간 것이다. 그때 당시 주위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해 이 일이 얼마나 은밀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일제는 어른, 젊은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끌고 갔기 때문에 형제가 혹은 부자가 한꺼번에 끌려가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돌아오기도 하고 또는 모두 죽기도 하는 등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이들이 탄 호마선은 짐을 싣는 배로 지붕이 있었고 300명 정도는 넉넉히 탈 수 있는 큰 배였으며 떠날 때는 이들이 작업시에 사용했던 갠노(함마), 노미(구멍 뚫는 도구) 등 도구도 함께 싣고 가, 옥매산 광산의 노무자들을 모두 제주도로 보내기 위해 계획적으로 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제주도의 모슬포에 있는 한 군인 막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각 작업장으로 배치되어 일을 하였다. 이들이 일했던 곳은 지금의 모슬포 부근인 삼방산이었다고 하며 주로 밤에 동굴이나 방어진지 파는 데 동원되었다고 한다.

▲ 옥매산 앞 부두
ⓒ 정윤섭

귀향 도중 원인모를 화재로 120여명 수몰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같은 해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먼 타향에 끌려온 옥매산 광산 노무자들도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기쁨에 들떴다. 8월 23일(음력 7월 16일) 이들을 태운 배는 해방에 대한 기쁨과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싣고 제주도를 출발하였다.

배가 추자도와 보길도의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기관실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다. 기관실에서 발생한 불은 진화되지 못하고 배는 4시간 가량 바다 위에서 표류하다가 침몰하였다. 이때 배에 탄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통이나 널빤지 등을 붙잡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시간이 점점 흐르자 집채만 한 파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삼켜갔다. 이때 일본 경비정으로 보이는 배가 지나가다 이들을 발견하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하나둘씩 구해주게 되는데 서로 살려달라고 외쳐대자 일본말로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부터 먼저 건져 올린 다음 한곳에 엉켜 떠 있는 사람들 몇몇을 건져 올리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푸른 바다에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고 한다.

이날 바다에서 해방의 기쁨을 채 맛보지 못하고 원혼이 된 사람의 수는 120여명. 제주에서 220여명이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100여명에 불과해 절반 이상이 바다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죽음을 더욱 원통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일제의 간교한 계략으로 끌려간 옥매산 광산노무자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조국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향선에서 망자의 넋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들은 완도의 청산도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청산도에 도착하자 해방의 감격에 젖어 있던 이곳 주민들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이들은 주민에게 부탁하여 배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꿈같은 귀향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자와 돌아오지 못한 자의 희비가 엇갈린 참혹한 날이었다.

지금도 음력 7월 16일이면 옥매산 부근마을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한날에 같은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타지로 나가거나 사망 등으로 예전처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때의 아픈 상처가 아직도 이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제동원피해 신고서 제출해 명예회복 추진

▲ 사건 당시 살아 돌아온 박복규씨의 아들 박장식씨
ⓒ 정윤섭
이때의 비극적인 사건은 이렇다할 조명을 받지 못한 채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몇몇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보상 문제를 제기해 보려고 했지만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정부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신고서'를 제출하라는 계획이 전달되어 당시 피해자가 많이 살았던 문내면 원문마을에서는 박복규씨의 아들인 박장식씨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사실 확인을 거친 서류를 작성하여 신고서를 제출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유가족들은 수십 년을 이렇다할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흘러온 이 사건이 과연 제대로 규명되고 보상받을 수 있을지 그저 반신반의할 뿐이다. 그나마 명예회복이라도 된다면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될 것 같은 심정이다.

지금 타지로 떠나 흩어져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때의 생존자들조차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사건에 새로운 역사적 조명이 이루어져 당시 이름 없이 죽어간 원혼들이 귀천을 떠돌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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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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