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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방 지식보고라는 책을 낸 순천에 사는 92세의 김창현 할아버지
백방 지식보고라는 책을 낸 순천에 사는 92세의 김창현 할아버지 ⓒ 서정일
재작년, '백방 지식보고'란 책을 낸 순천시 교량동에 사는 김창현(92) 할아버지. 정확히 구십의 나이에 4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을 출판한 것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책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젊은 사람들도 상당히 힘들어 한다. 그런데 구십의 할아버지가 혼자 글을 쓰고 또 편집을 해냈다는 것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다.

2002년도에 발간된 김창현편집 '백방 지식보고'는 김할아버지의 나이 구십에 만든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2002년도에 발간된 김창현편집 '백방 지식보고'는 김할아버지의 나이 구십에 만든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 서정일
김 할아버지는 1914년 3월 7일 농사짓는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뒷바라지 속에서 자랐는데 선친은 가르침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일자무식이었는데 아들 만큼은 많이 배우게 해야겠다 싶어 일찍부터 서당에 다니게 했지."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선친의 덕이라고 말하는 김 할아버지.

3학년까지 보통학교를 다니다 11살 때부터 21살까지 10여 년간 서당에 다녔다. 배운 만큼 써 먹기를 바라는 마음은 선친이나 김 할아버지나 같았으나 어수선한 나라사정이 김 할아버지의 앞길을 막은 것. 험한 세월을 넘기고 나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농사짓는 일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곳에 가도 송곳은 뚫고 나온다'는 속담처럼 면서기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나라 질서가 잡히지 않아 김 할아버지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어 사표를 내고 다시 농사일을 하러 돌아왔다고 한다.

"이장도 15년 정도 했고 발동기도 부렸으니 그래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지"라고 말하는 김 할아버지. 방앗간이 없을 때 발동기는 쌀 도정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으로 마을에 한대밖에 없어 괜찮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김할아버지는 스물한살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으면서 틈날때마다 들여다 본다
김할아버지는 스물한살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으면서 틈날때마다 들여다 본다 ⓒ 서정일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게 구렁이가 담장을 넘어 다니고 지붕 위를 기어 다녀 쫓을 요량으로 발동기에서 나오는 폐유를 물총에 담아서 뿌렸는데 그 다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면서 전설 속에서나 나옴직한 얘기를 들려준다.

그 후 먹고살게 없어 힘들어하는 차에 1959년 정부에서 빈민들에게 포구에 무료로 주는 집이 있다고 해서 이사를 하고 농사꾼에서 고기 잡는 뱃사람으로 둔갑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또한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개발로 인해 다시 한번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곳이 지금 사는 교량동.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책이 많다면서 할머니가 뒷방에서 보여준 책무더기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책이 많다면서 할머니가 뒷방에서 보여준 책무더기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서정일
그렇게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고 인생은 허망하다고 느낄 즈음 자신이 죽고 없다고 해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수 있는 글 하나 정도는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편집을 시작한 게 5년 전인 2000년도의 일.

물론 꾸준히 써온 글들이 있었기에 항상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선뜻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2002년 2월 드디어 매제의 도움을 받아 책을 인쇄 하게 되던 날 김 할아버지가 느끼는 감회는 남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의 말처럼 '팔려고 낸 책'인데 결과는 허망했다고 한다. 600만원을 들여 인쇄하고 또 기력이 쇠약해졌음에도 밤낮없이 자신의 책이 나온다는 기쁜 마음으로 작업했는데 빚만 늘어나게 되었다면서 "괜한 일했다"고 말하는 김 할아버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책이 많이 남아있다고 뒷방을 열어 보여주는 할머니를 보고 돌아서는 기자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덧붙이는 글 | '낙안민속마을의 사계'를 연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김창현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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