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은 제2차 세계대전사에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기록될 '도쿄 대공습'의 60주기다. 미군이 투하한 소이탄에 희생된 사망자 수는 이날 하루 무려 10만여명에 달한다. 당시 12살이던 일본인 사오토메 가츠모토씨는 그날 밤 도쿄 하늘을 뒤덮던 B-29 폭격기 편대의 굉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공습이 시작된 것은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공습과는 전혀 달랐어요. 폭격기 편대가 하도 낮게 날아 폭격기 밑에 반사되는 화염을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폭격기들이 투하한 폭탄은 소이탄이었어요. 사방천지에서 불꽃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길이 워낙 거센데다 강한 북풍까지 불어와 화염이 더욱 거세게 번졌어요. 여기저기서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을 비틀고 있었습니다."
꼭 60년 전인 1945년 3월 10일, 미국은 그동안 지켜온 대 민간인 교전수칙을 저버리고 기어이 선을 넘고 말았다. 곤히 잠이 든 도쿄의 하늘에 334대의 B-29 폭격기를 보내 50만개의 소이탄을 투하한 것이다.
공습의 목표는 연약한 목재건물로 가득하고 수십만의 민간인들로 북적이는 대도시에 가능한 최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이날 공습을 지휘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약 10만으로 추산되는 도쿄시민이 "불에 타 죽거나 뜨거운 강물에 데어 죽고 혹은 엄청난 열기에 산화해 죽어갔다". '도쿄 대공습'은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최대규모의 대량학살이었고 그 참상의 정도가 1945년 2월 13일에 있은 독일 드레스덴 공습을 훨씬 능가했다.
그날 B-29 폭격기를 몰고 공습에 참여한 체스터 마샬은 그 파괴의 현장을 날았다. 그는 호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약 1500미터 상공을 저공비행 했는데 인육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공습 이후 며칠간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속이 울렁거렸는지 몰라요. 저희 동료들은 '이게 무슨 냄새냐'며 서로 물었는데 약간 달콤한 냄새가 났지요. 그때 누군가 말했어요. '저게 바로 사람 살이 타는 냄새임에 틀림 없어'."
심지어 도쿄의 강물조차 이 지옥의 불꽃 속에서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소이탄에는 젤리처럼 처리된 석유가 들어있었고 이는 20년 뒤 베트남전에서 사용된 네이팜탄의 원형이었다. 이 석유 젤리가 사방에 들러붙었고 심지어 강물조차 태워버렸다. "운하가 부글부글 끓었고 쇠도 녹아 내렸다. 건물과 사람들이 한꺼번에 화염에 휩싸였다." 존 다우너는 그의 책 <무자비한 전쟁>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살기 위해 강물과 운하로 뛰어든 사람들은 엄청난 열기 속에서 끓는 물에 삶아져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 날 당시 19살의 학생이었던 스즈키 이쿠코는 생존자를 찾아나섰다. "시내에 사시던 선생님 집을 찾아갔지만 폐허와 불에 탄 정원수 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나중에 선생님의 시신이 오모테산도에 모아 놓은 시체더미에서 발견됐다는 말을 들었지요." 오늘 날 오모테산도는 도쿄의 가장 번화가 중 한 곳이다.
이날 소이탄 공습으로 도쿄시내는 반경 약 15Km가 완전히 연소돼버렸고 약 1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이날의 대량파괴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개월에 걸쳐 반복된 공습작전의 서막이었고, 결국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폭격기의 행렬이 끝이 날 즈음에는 이미 일본의 70개 도시가 폐허로 변했고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이 생명을 잃은 뒤였다. 르메이 장군은 "만약 미국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우린 십중팔구 전범으로 처벌 받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일부는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일본 역시 이런 보복을 받아도 될 만한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중국의 상해와 중경에 가한 무자비한 폭격, 남경의 대학살 이외에 아시아 전역에서 저지른 잔학행위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
호주의 전 외교관이자 아키타 대학의 부총장인 그레고리 클라크는 "당시 상황의 맥락을 떠나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린애였던 나는 일본이 공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연합군이 일본 열도에 상륙해 지상전을 벌일 경우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을 두려워한 탓에 보복과 공포의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일본 후방에서는 이미 수백만의 민간인이 국토방위를 위해 조직돼 있었다.
한편으로 다른 이들은 나찌가 영국 전역에 가한 '비인도적 야만행위'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비난할 수 있었던 연합군의 도덕적 우위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누구도 이런 모순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는 "파시스트 정권을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역사적으로 민간인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쿄공습은 훗날 냉전시대의 전사들에게 일종의 수습기회나 다름 없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반전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풍자한 정신병자 잭 리퍼 장군은 바로 르메이 장군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영화에서 그는 "전시에는 살상을 해야하고 충분히 많은 사람을 죽이면 싸움을 멈추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르메이 장군은 훗날 미국공군참모총장(1961~65)으로 영전했다. 그는 구소련과 3차 대전을 촉발시키려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르메이 장군이 일본 자위대를 재건한 공을 인정받아 1964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국가최고훈장을 서훈 받은 것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197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과 맞먹는 황당한 정치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도쿄와 히로시마, 나가사키 공습을 기획하는데 일조한 통계학자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의 와중에 백악관 안보보좌관(1960~68)으로 변신했고, 그는 네이팜탄과 고엽제로 베트남 전역을 융단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난해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전쟁의 안개속에서>에서 맥나마라는 승자의 정의에 대한 도덕적 고민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그는 "전시에 공습을 하지 말라거나, 살상을 하지 말라거나, 하룻밤 사이에 10만의 민간인의 목숨을 뺏지 말라는 무슨 규정이라도 당시에 있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도쿄 공습의 유산은 지난 세기의 후반기에 걸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역사학자 마크 셀던은 "전투지역과 비 전투지역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한국전쟁에서 베트남전, 그리고 걸프전에 이르는 전쟁과 최근에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종족분쟁에 이르기까지 후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유산인 것이다.
지금 도쿄 중심가는 1945년의 소이탄 공습으로 산화해 버린 피해자들의 재 위에 지어진 휘황찬란한 콘크리트와 유리 숲의 위용을 뽐내며 새삼 일본의 놀라운 재건능력과 건망증을 일깨워주고 있다. 당시 사건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린 시노자키 하테의 말이다. "당시 공습에 대해 어머니는 내게 전혀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하시죠."
일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공습에 대해 말하려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본은 1950년 이후 미국이 제공하는 방위우산 속에 몸을 숨겼고, 소위 '환태평양 동맹'이라는 수사 속에 과거의 죄를 묻어버렸다.
이제 72살이 된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사오토메 가츠모토는 이런 일본인들의 역사적 건망증을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 그는 2년 전 80만 달러에 가까운 기금을 모금해 당시 공습을 기념하는 박물관을 지었다. 끔찍한 사진들과 증언, 그리고 열에 녹아 뒤틀린 가옥의 파편들이 공습에서 살아남아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몇 안되는 유물들이다.
가츠모토는 지적한다.
"일본인들은 아직 과거에서 충분히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게 바로 일본 정부가 의도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 정부는 만약 일본인들이 이 비참한 과거에 대해 알게 된다면 미래에 감히 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이제 나이가 든 가츠모토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잊는 것이다.
"드레스덴, 아우슈비츠, 그리고 도쿄공습의 참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제 점점 나이가 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역사에 있어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후대 세대는 선배 세대가 남긴 증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더이상 말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나라는 과오를 다시 반복합니다. 독일이나 프랑스가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짓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즈키 이쿠코 여사는 "젊은 사람들이 전쟁의 공포를 잘 모른다"고 말한다.
"이라크전이 벌어졌을 때 나는 텔레비전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것을 지켜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내 손자녀석은 그 장면이 멋지다고 하더군요. 꼭 비디오 게임 같다나요?"
(번역: 민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