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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 직후 미 공군의 B-29 폭격기 승무원이 히로시마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
원폭 투하 직후 미 공군의 B-29 폭격기 승무원이 히로시마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 ⓒ 미국문서보관소

야마오카 미치코...그녀는 직장으로 가는 도중에 폭격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으며 손상된 얼굴과 몸에 27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
야마오카 미치코...그녀는 직장으로 가는 도중에 폭격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으며 손상된 얼굴과 몸에 27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

"맑은 하늘에 그 비행기가 나타났습니다."

야마오카 미치코는 말한다. 그녀의 말을 듣노라면 피랍된 보잉767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하던, 이제는 하나의 상징이 돼버린 그 장면이 절로 생각난다.

하지만 그녀는 9.11 사태가 아니라 60년 전에 일어난 히로시마의 참사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1945년 8월 6일, 그녀가 집을 나와 시내로 걸아가던 도중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익숙한 B-29 폭격기의 굉음이 들려 왔지만 잠시 후 대 참사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당시 15살 소녀였던 그녀의 얼굴은 그 순간 일그러져 버렸다. 최근까지 27회가 넘도록 수술을 했고 두꺼운 화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점과 혹 투성이인 그녀의 얼굴은 마치 불에 탄 찰흙으로 빚어놓은 것 같다. 그녀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기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폭발의 위력으로 몸이 하늘로 떠오르자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했다. "마음 속으로 '안녕, 어머니'라고 생각했지요." 야마오카씨를 잔해에서 끄집어낸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얼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팔의 피부는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고 소변을 보면 피가 났습니다. 내 얼굴이 너무도 끔찍해서 오랜 세월 숨어만 살았습니다. 나 혼자였다면 진작에 죽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계셨지요. 어머니도 아프셨지만 매일 저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위해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꼭 살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녀의 어머니는 1979년에 사망했다. 어머니의 시신을 화장하자 재 속에서 피폭 당시 몸에 깊숙히 박혔던 유리 파편들이 나왔다.

27만명에 달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의 피폭자 및 생존자와 마찬가지로 야마오카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유방암, 골다공증, 우울증 등에 시달렸고 작은 아파트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아프지요. 하지만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 더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기억해야만 하지만요."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죽음의 도시

츠보이 스나오...대학생이었던 그는 폭발의 충격으로 공중으로 10미터 날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상을 입었다.
츠보이 스나오...대학생이었던 그는 폭발의 충격으로 공중으로 10미터 날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상을 입었다.
8월 6일 하루에만 16만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그 후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피폭의 영향으로 사망했다. 히로시마 시에서는 매년 희생자 명단에 새로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명단에 오른 공식 사망자수는 현재 23만7062명이지만 지금도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3일 후 단행된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또 다시 7만4천명이 1년도 못 되어 사망했고, 도시는 시장의 유명한 말처럼 "벌레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사람들 역시 질병의 고통과 싸워야 했다. 타카야마 히토시는 등과 둔부에 종양이 생겼다. 등 근육의 대부분을 제거했다며 기자에게 만져보라고 했다. 그의 등은 뼈가 만져졌고 차가웠다.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내 상처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당시 스무살로 결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었던 누마타 스즈코는 히로시마에서 무너진 건물에 왼쪽 다리가 깔리면서 산산 조각났고, 3일 후에는 마취제도 없이 무릎 밑의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톱으로 다리를 잘라 낼 때 마구 비명을 질러댔지요." 그녀가 말했다.

"전쟁 중에 이렇게 노래하곤 했습니다. '1억명의 사람들이 불덩이같이 한 마음으로 일체가 되자'"
"폭탄이 떨어지고 트럭들이 돌아다녔지만 여자나 아이들은 무시하고 건장한 남자들만 구해갔지요. 우리는 소용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때 처음으로 전쟁의 참모습을 알게 됐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약혼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폭 투하로 다친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피폭자 차별'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방사선 피폭이 전염되는 것으로 믿었고 그들이 기형아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들도 차별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몇 년 내 죽을 지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츠보이 스나오의 말이다. 그는 히로시마 피폭 여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쟁이 끝나 있었지만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무슨 속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죽을지 엄밀하게 관찰했지요." 나중에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됐지만 그녀의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했다. "우리는 같이 자살하기로 하고 약을 먹었지만 죽을 만큼 먹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살아있는 게 너무 기뻐 같이 울었습니다."

"히로시마로 와서 전쟁 모습 보라"

테라마에 타케오...고등학교 3학년으로 전화국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었던 그녀는 깨진 유리에 크게 다쳐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테라마에 타케오...고등학교 3학년으로 전화국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었던 그녀는 깨진 유리에 크게 다쳐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 안드로 니키
한 때 군사 중심지였던 히로시마는 현재 백 만명의 인구를 자랑하고 나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밝은 분위기의 도시로 탈바꿈 했다. 박물관, 기념공원, 평화거리, 그리고 움푹 파인 유명한 원폭 돔 등 히로시마는 이제 그 상처를 드러내놓고 치료하고 있다.

작가 이안 부루마는 히로시마를 '일본 희생자들'의 중심지, '종교적 분위기를 지닌' 순례지라 부른 바 있다. "순교자는 있지만 신은 없다. 기도가 있고 인간의 몰락에 대한 신화도 있다." 히로시마 안내 책자에 나오는 말이다. "히로시마는 단순히 일본의 한 도시가 아니라, 세계 평화의 메카로 전세계에 인식되고 있다."

아시아인들에게 히로시마가 갖는 의미는 마치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현장)'가 중동의 아랍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비슷해서 '선택적 고통'의 상징이다.

일본인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는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이를 핑계로 교육, 역사책, 대중문화에서 일본이 다른 국가에 끼친 고통을 호도하고 있다.

1996년 히로시마 '평화의 돔'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때 미국과 중국은 이에 반대했다. 미국은 그 지명에 있어 "역사적 관점이 부족하다"고 반대했고, 중국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돔을 잘못된 목적으로 사용할까" 우려된다고 했다.

히로시마는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우리는 희생자인 척 할 의도가 없습니다." 히로시마 평화박물관 관장 하타구치 미노루의 말이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저지른 일을 이곳에서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피폭자들은 그런 비난이 남의 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야마오카는 말한다. "하와이, 한국, 중국, 오키나와, 미국에도 다녀왔고 일본이 저지른 짓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저는 일본과 미국 등 모든 나라의 정부를 비난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히로시마로 와서 전쟁의 진짜 모습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 받았지요. 폭탄이 떨어지는 그날까지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매일 그런 말을 들었지요. 나라를 위해 죽어라! 그게 교육이 갖는 무서운 힘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전쟁에 대해 좀 더 말해줄 것을 부탁하지요. 사람들이 잊을까 두렵습니다."

'리틀 보이'라고 명명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한 '에놀라 게이'호의 조종사였던 폴 티베츠는 올해 3월 또다시 후회가 없느냐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천만에요, 달리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물론 다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5월 그의 동료인 전 국방장관(1960~68) 로버트 맥나마라는 일종의 사과를 했다. 그는 당시 미 공군의 전략 통제관으로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전에 단행된 64개 일본 도시에 대한 소이탄 공습계획을 입안한 바 있다.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임박한 종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를 가리켜 "너무나 이상해서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선전 포고에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데 원폭으로 대량학살을 하기로 결정하는 마당에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20분 정도 상의하고는 끝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그러했다. … 지금처럼 원자폭탄의 사용가능성이 두려웠던 적이 없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원폭 사용을 주장했던 사람의 말이다.

핵탄두 8천개 보유한 미국... "왜 전쟁을 그만두지 않는가"

누마타 스즈코...그녀는 폭격으로 왼쪽 다리가 날아갔을 때 스무 살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삼일 후 다리가 곪기 시작해서 마취제도 없이 무릎 밑으로 절단해야 했다.
누마타 스즈코...그녀는 폭격으로 왼쪽 다리가 날아갔을 때 스무 살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삼일 후 다리가 곪기 시작해서 마취제도 없이 무릎 밑으로 절단해야 했다. ⓒ 안드로 니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이 떨어진 지 6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약 8000개의 '유효한 또는 작전용' 핵탄두를 보유고 있다. 그 각각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의 평균 20배에 달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기존 핵 보유국 리스트에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가 합류했고, 이란과 북한도 그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 대만, 사우디 아라비아, 심지어는 일본의 정치가들까지도 언제가는 자국도 핵무기를 보유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2003년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히로시마 원폭의 삼분의 일 정도 되는 소위 '사용 가능' 핵무기의 개발을 지지했다. 히로시마의 아키바 타다토시 시장은 2004년 미국이 "UN과 국제법을 무시하고 있고 다른 국가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비판한 바 있다.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의 종말을 막고자 했던 피폭자들은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자신들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많은 희생자들이 이제야 겨우 입을 열고 있다.

"난 미국을 증오했습니다." 사촌 등 많은 친척을 피폭으로 잃은 하타케야마 히로코의 말이다. 히로코는 사촌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그 죽음의 징조에 겁먹은" 사촌의 얼굴에 떠오른 텅 빈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말한다.

2년 전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연설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녀는 가지 않으려 했다. "미국에 간다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갔지요."

"아직도 핵무기를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야마오카는 말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공개석상에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서기 싫었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살리셨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그 만큼 빚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으셨지요. 이는 제가 어머니의 은혜를 갖는 방법입니다."

누마타도 그 때 그 일을 회상하기 싫어하는 또 한 명의 생존자다. "은퇴한 후에야 그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어려웠고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제 경험을 학생들에게 말했더니 나중에 편지를 보냈더군요. 그 아이들은 저 때문에 맘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화가 났어요. 내가 원한 건 동정심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에게 바란 것은 절대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이 아는 것입니다."

피폭 중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하실에서 고지마 가즈코씨의 어머니는 지친 몸으로 가즈코를 낳았다. 당시 지하실에는 폭격으로 죽거나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체 더미 속에서 태어난 새 생명에게서 영감을 얻은 반전 시인 쿠리하라 사다코의 시 덕분에 그녀는 이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고지마는 미래의 희망에 대한 살아있는 상징이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웃으며 말한다. "그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지요.", "제 아들에게도 말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지 않으려는 일본인다운 특성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쿠리하라씨가 올해 돌아가셨고 나도 60이 다 됐으니 이제는 뭔가 할 때가 됐죠."

그녀는 원폭 투하에 대해 쓰린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일보다는 미국이 지금 벌이고 있는 전쟁에 더 화가 납니다. 왜 그만 두지 않는 거죠? 문제를 해결할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은가요? 사람들이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폭 생존자 8명의 증언 "핵무기 만들려는 사람들 내 모습 봤으면..."

야마오카 미치코
야마오카 미치코 ⓒ 안드로 니키
야마오카 미치코: "아직도 핵무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 모습을 봤으면 합니다." 당시 15세로 전화국에서 일하고 있었던 야마오카의 증언이다. 그녀는 직장으로 가는 도중에 폭격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그녀의 모친이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무너진 벽 밑에서 죽었을 것이다. 얼굴이 너무나 크게 훼손돼서 죽으려 했지만 모친이 다시 살 의지를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손상된 얼굴과 몸에 27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


타카야마 히토시
타카야마 히토시 ⓒ 안드로 니키
타카야마 히토시: 당시 15세로 폭탄이 떨어졌을 때 미나미 거리에 있는 니폰 익스프레스 회사 자동차 차고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16년이 지난 후 그의 등과 둔부에 암이 발생했다. 그는 그 끔찍했던 상황과 주위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 타카야마는 셔츠를 들어 암 수술로 근육 대부분을 제거한 등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 상처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테라마에 타케오
테라마에 타케오 ⓒ 안드로 니키
테라마에 타케오: 1945년 8월 6일 당시 테라마에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전화국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었다. 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녀는 직장에 있었고 깨진 유리에 크게 다쳐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녀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도움으로 강을 헤엄쳐 건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살 수 있었다. 그녀를 도와주었던 선생님은 그후 사망하고 말았다.


츠보이 스나오
츠보이 스나오 ⓒ 안드로 니키
츠보이 스나오: 20살의 대학생이었던 스나오는 폭발의 충격으로 공중으로 10미터 날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상을 입었다. 그는 당시가 "지옥 같았다"며 "사람들이 한쪽 눈이 빠져 나오고 살이 파헤쳐져 뼈가 드러난 상태로 도시를 헤매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고지마 가즈코
고지마 가즈코 ⓒ 안드로 니키
고지마 가즈코: 그녀는 폭탄이 떨어진 지 이틀 후 피폭 중심지에서 불과 1.6Km 떨어진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시인 사다코 쿠리하라가 쓴 새 생명의 탄생에 관한 시 덕분에 고지마는 유명해졌다. "우리는 새 생명을 낳을 것이다"는 제목의 시는 영어로 출간된 바 있다.




하타케야마 히로코
하타케야마 히로코 ⓒ 안드로 니키
하타케야마 히로코: 당시 초등학생으로 폭발 중심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동갑이었던 사촌 등 많은 친척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미국을 '증오한다'고 고백한 생존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2년 전 유엔본부에서 연설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녀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미국에 간다는 생각 자체가 싫었습니다."



누마타 스즈코
누마타 스즈코 ⓒ 안드로 니키
누마타 스즈코: 누마타는 폭격으로 왼쪽 다리가 날아갔을 때 스무 살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삼일 후 다리가 곪기 시작해서 마취제도 없이 무릎 밑으로 절단해야 했다. 나중에 약혼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20년 전 은퇴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타구치 미노루
하타구치 미노루 ⓒ 안드로 니키
하타구치 미노루: 히로시마 평화기념박물관의 관장으로 폭격으로 부친을 잃었다. 당시 모친은 임신 2개월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던 기차역으로 남편을 찾아 나섰지만 그의 시계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타구치는 그 시계를 사무실 유리 케이스 안에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는 징표로 삼고 있다. "아이들이 그 일을 잊을까 두렵습니다. 저희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가 지난 수년 간 계속 줄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데이비드 맥닐 기자는 일본 도쿄에서 활동중인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칼럼니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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