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을 1주일 앞둔 휴일 아침, 제주도의 아침은 쏟아지는 눈과 함께 하루를 열었다. 어제 내린 비가 봄비인가 했더니, 다시 겨울이다. 3월이 되면 화려하게 봄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삭풍이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쉬이 봄바람을 만들지 않으니 마음만 조급해진다.
성급하게도 겨울 외투를 장롱 속에 넣어둔 것을 보면 무던히도 봄을 기다렸나보다. 환절기 날씨는 항상 변덕을 부린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거운 것을 털어버리고 새 것을 기다리는 욕망의 성급함. 날씨처럼 내 마음도 변덕스럽다.
제주도의 봄은 아흔 아홉 골의 흰 눈이 모두 녹아야 비로소 봄이 시작된다. 겨우내 내렸던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다시 차곡차곡 쌓이는 백설기, 그 백설기 위에 다시 쌓이는 흰 눈은 구구동의 골짜기를 하얀 소복으로 겹겹이 갈아입힌다.
제주시 해안동 산 220-1번지. 이곳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깊고 얕은 골짜기, 오밀조밀한 봉우리, 꼬불꼬불 이어지는 비탈길, 하늘을 가리고 있는 이름모를 수목들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한 골짜기가 모자라서 맹수가 살지 않는다는 아흔 아홉 골, 삼라만상이 숨쉬고 있는 아흔아홉 골짜기 구구동. 그 골짜기의 계절은 아직 겨울이다.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은 아흔 아홉 골이 시작되는 첫 번째 골짜기에서부터 자동차를 멈추게 했다. 3월에 내리는 흰 눈은 왠지 포근함이 배어있다. 그래서인지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맞으며 아흔 아홉 골짜기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아흔 아홉 골의 매력은 그리 가파르지도 않고 평탄하지도 않아 등산로를 걷는 기분과 산책로를 걷는 기분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데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심산유곡에서 풍겨 나오는 고요함과 그윽함에 취하고 복잡한 속세와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
골짜기 하나하나를 다 셀 순 없지만, 골짜기 하나하나에 숨겨진 기암괴석과의 만남 그리고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차디찬 약수에 한 모금 목을 축이면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아마 봄을 기다리는 내 마음 같다고나 할까.
아흔 아홉 골짜기 끝에는 작은 암좌가 있다. 그래서 빽빽이 들어선 나뭇가지 위에 마음의 등불 하나를 달고 걷는 기분 또한 속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발버둥이다.
아흔 아홉 골의 작은 암좌 천청에 매달린 범종이 인상 깊었다. 암좌 지붕에는 매달린 고드름과 조화를 이룬다고나 할까? 삐죽이 얼굴을 내민 진달래 꽃봉오리가 흰 눈 속에 갇혀 겨울 속에 빠져 있다.
봉오리 마다 눈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몸부림을 치는 것 같다. 그러나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이 어찌 이 마음을 알랴! 가녀린 가지 위를 무겁게 덮고 있는 심술, 가지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하다.
키 작은 조릿대는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라산 중턱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조릿대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파리 위를 덮고 있는 하얀 눈을 손으로 털어 주고 싶었지만 이파리의 아픔을 알면서도 그냥 스친다. 그리고 하루 빨리 흰 눈이 녹기를 기다릴 뿐이다.
빼곡히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에 핀 눈꽃이 장관이다. 서로 뒤엉켜 얼싸 안고 있는 이름모를 수목들, 드러낸 알몸 위에 솜털을 감고 있으니 그래도 포근해 보인다. 겨울 끝에서 조그맣게 봄을 볼 수 있는 이차원적 세계가 바로 이곳에서 펼쳐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오름들, 눈꽃으로 단장한 오름들의 풍경은 하얀 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하다. 그러나 오름의 풍경을 신록으로 물들이는 내마음은 그저 봄날을 꿈꿀 뿐이다. 봄에 느껴보는 겨울풍경.‘겨울 지나면 봄도 머지 않으리’라는 시구를 기억하면서 아흔 아홉 골에 피어 있는 눈꽃의 절경은 그저 하나의 사진 속에 담아 놓았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곳에 봄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길: 제주시- 99번도로(1100도로)- 천왕사입구- 구구곡계곡(입구에서부터 3km지점)으로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리고 아흔아홉골에서 암좌인 석굴암까지의 산행 시간은 왕복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