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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학교라고는 근처에도 못 가본 무학자입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네모진 돌판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적어 주셨는데, 어머니는 며칠 동안 그걸 조합해서 '가나다라.....'를 쓰고 익혔습니다.

어머니의 글공부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가난과 여자라는 두 장애물이 글을 읽고 적을 수 있는 어머니의 눈을 가리게 했나 봅니다.

어머니의 친정은 우리 동네 바로 아랫마을입니다. 같은 무기리인데 자연부락이 무기마을과 돈담마을로 나뉘어져 있을 뿐입니다. 1919년 기미년 만세가 있은 직후에 태어나서, 열다섯에 아버지와 혼인을 하고 일 년을 친정에서 지낸 후인 열여섯에 우리가문으로 시집(묵신행)을 왔습니다.

어머니의 세월은 가슴이 아프고 서러워서 나는 차마 적지 못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이태 전 친정의 자랑으로 여기던 무기연당을 보시고 그 감회를 빛바랜 공책에다 적어 두었습니다. 그 글자들은 더러 토씨가 빠지거나 받침이 없는 등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려운 것을, 나는 굳이 말을 맞추고 살을 더하여 옮기고자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유일하게 적으신 혼글이기 때문입니다.

▲ 어머니가 적으신 글씨
ⓒ 한성수
무기마을은 지금은 타성바지가 많이 살지만, 어머니가 자라던 그 시절은 상주 주씨들의 집성촌이었습니다. 외할머니와 할머니는 10촌의 집안 동기간이었는데, 같은 동리로 시집을 와서 내왕이 있던 터라, 그 인연으로 어머니도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우리 동네로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흔 한해를 청주한씨 가문의 며느리로 살고 계십니다.

-어머니의 노래-

"우리나라에 이름난 우리 상주 주(尙州 周)씨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이요, 누대(累代) 충효대가(忠孝大家)로, 구틀(대문 아래에 나무 등으로 만든 턱)없는 대문 집에 현판(懸板)에는 금자(금색을 입힌 글자)로 새겨 있고, 감은공 높은 집(感恩濟)에 선대조상 풍유로세. 투구안장 갑옷 구경하니 그 장하심을 높이높이 칭송합니다. (몇 해 전 연당에 모셔져 있던 선조들의 영정과 유품을 공개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 감은제 모습
ⓒ 한성수
석가산(石假山)을 바라보니 삼층으로 되어 있고, 물 가운데 괴석(怪石)들은 기묘하고 기이하다. 수 백 년 묵은 은행나무는 연못에 차일(遮日:햇빛을 가리려고 치는 포장)치고, 남풍(南風) 춘풍(春風 : 봄바람) 휘어잡아 우쭐우쭐 춤을 출 때, 비금(飛禽 : 날아다니는 새)이 노래하니 춘색(春色)이 완연하다. 물가에 누운 향나무, 구불 구불 천수(天壽)를 누리는 듯.

▲ 석가산과 연못에 비친 소나무
ⓒ 한성수
풍욕루(風浴樓) 올라가 경물(景物 : 철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경치)을 살펴보니 연못가에 온갖 화초(花草) 창창(蒼蒼 : 바다나 호수 따위가 파랗다는 뜻)한 푸른 물에 옥록홍황(玉綠紅黃 : 옥색, 푸른색, 붉은색, 누른색 - 온갖 색깔) 낙화(落花)되니(꽃이 물에 어려 떨어지는 것처럼 보임).

▲ 풍욕루 앞의 오래된 향나무
ⓒ 한성수
하환정(荷換亭) 기둥 앞에 선비들 글 읽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 붉은 소나무 두 그루는 천상(天上)을 향하여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듯, 푸르고 맑은 물에는 잉어 떼가 먹이를 찾느라고 지느러미를 세워 마치 전쟁하는 형색이요, 이 좋은 우리보물 자손만대 보존하세!

2003. 2. 2. 음력 설 이튿날 주진갑 적다(어머니는 어머니의 할머니 진갑년에 태어나셨습니다).


일요일(3. 13)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부부는 주씨 고가를 지키는 종부(宗婦)에게 열쇠를 받아 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그루라던 소나무는 죽었는지, 어머니께서 잘못 아신 것인지 한 그루였고, 연당 물은 탁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소홀했던 외가를 찾아 그도 역시 내가 존재하는 또 다른 뿌리임을 느꼈습니다.

무기연당 및 주씨 고가 소개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번지 내 위치한 무기연당은 주재성의 생가에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입니다.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산의 모양을 본떠 놓았는데, 이후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이라 하고 호를 삼았으며,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였다고 합니다.

연못의 서북쪽에는 오래된 정침 한 채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을 고쳐서 그 가치를 잃고 말았습니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풍욕루(風浴樓)와 하환정(何換亭)을 지었고, 최근에 충효사(忠孝祠)를 지었습니다. 연못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습니다.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정원문화(庭園文化) 연구에 좋은 자료이기도 한 이곳은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함안군청 자료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칠원면 사거리에서 마산방면 국도 5호선을 따라 약 2Km정도 가면 무기다리가 있고 좌회전해서 1Km 더 가면 무기마을이 나오는데, 연당은 마을 가운데쯤에 있습니다. 혹여 마산근처를 지나시거들랑 내 늙으신 어머니의 자긍이 서려있는 무기연당을 찾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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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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