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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때 어머니가 닭과 감자가 듬뿍 들어간 '닭도리탕'을 만들어 주면 '도리'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채 털구멍이 송송 보이는 닭 껍질을 징그럽다고 열심히 벗겨내며 먹었다. 오도독뼈는 먹어도 된다고 하여 잘 깨물어 먹었다. 명절 때 여럿이 모이면 '고도리'가 왜 '고도리'인지 모르면서 고스톱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도리'의 뜻을 알게 되었다. '도리'는 일본 단어로 우리말로는 '새' 또는 '닭'이었던 것이다. 고스톱을 칠 때 새 그림이 들어간 화투 낱장을 다섯 장 모으고는 "고도리!" 하고 기고만장하여 외치는데, '고'는 일본 단어로 우리말로는 '다섯'이니 '고도리'의 뜻을 마침내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우리말로 하면 '다섯 새'인 것이다.

화투가 일본에서 건너온 오락인 걸 알고는 그때부터 우리 형제는 명절 때 고스톱을 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윷놀이를 했다.

요즘 PC방에 가면 젊은 부부가 밤 늦게 함께 와서 고스톱 게임을 실컷 하고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기까지 업고 말이다. 그런데 '고도리'가 일본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도리!" 하고 외치며 흥분하는 것을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주 가는 한 음식점에서는 '닭도리탕'을 잘 만든다. 감자를 듬뿍 넣고 청양고추를 적당히 넣어 얼큰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도리'가 일본어인 줄 알고 있는 내가 그 음식을 주문할 때 "닭도리탕 줘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닭도리탕'은 우리말과 일본어가 함께 묶여 만들어진 국적 불명의 해괴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번역하자면 '닭닭탕' 또는 '닭새탕'인 셈인데, 그렇게 번역해도 제대로 된 단어는 분명히 아니다.

▲ 왜색을 띤 국적 불명 이름을 가진 한국식 매운 음식 '닭도리탕'
ⓒ 김선영
▲ 감자와 닭고기와 청양고추와 마늘과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시뻘건 '닭도리탕'은 분명 한국식인데 이름은 왜 그 모양일까?
ⓒ 김선영
▲ 더 이상 늦추지 말고 '닭도리탕'을 '닭매운탕' 또는 '닭감자탕'이라고 바꾸어야 할 것이다
ⓒ 김선영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문한다.

"닭매운탕 만들어 줘요."

그러고는 "'닭도리탕'의 '도리'는 일본말이니까 '닭매운탕'이나 '닭감자탕'으로 식단표 이름을 바꾸었음 좋겠어요"하고 알려준다. 그러나 "그렇게 붙여 놓으면 '닭도리탕' 안 하는 줄 알고 '닭도리탕' 주문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하고는 고집스럽게 바꾸지 않는다.

▲ '닭도리탕'이란 왜색 이름이 버젓이 들어가 있는 식단표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 김선영
'우동'이니 '오뎅'이니 하는 말은 일본 음식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닭도리탕'만큼은 '닭매운탕'이나 '닭감자탕' 또는 더 적절한 말로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내가 들른 음식점에서 '닭도리탕'이 식단표에 있을 때는 어디에서나 "'닭매운탕'이나 '닭감자탕'으로 바꿔야 할 겁니다"하고 가르쳐 주지만 어느 한 집 예외 없이 '소 귀에 경 읽기'다.

심지어 '○○ 닭도리탕'이라는 이름으로 프랜차이즈 경쟁에 나선 체인본부도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가. 그 업체의 사장이 일본인이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1970년대에 중화요리점에서 사용하던 음식 이름인 '야끼만두'가 이제는 '군만두'로 바뀌어 있듯이, 일본인들이 우리를 더 비웃기 전에 '닭도리탕'도 '닭매운탕'이나 '닭감자탕'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 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주로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신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하반기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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