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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갯버들
섬진강 갯버들 ⓒ 김도수
강변에 자라고 있는 갯버들, 겨우내 하얀 솜털을 감싸고 있던 알맹이들이 봄바람에 꽃밥이 서서히 붉게 올라오던 봄. 아버지는 오일장에 나가 손수건과 책보 하나를 사왔다.

코 흘리게 어린 막둥이 자식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손수건을 곱게 접어 내 왼쪽 가슴에 옷핀으로 고정시켜 매달아주었다. 처음 받아 든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버지 손을 잡고 섬진강 강변 길을 따라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

“학교 댕길라먼 인자부턴 옷소매에다 코 닦지 말고 여기 손수건에다가만 닦아라. 인자는 어엿한 학생이 됐응게 옷 소매가 뻔득거리면 안 됑게 꼭 손수건에만 닦아라. 알았제. ”

입학식을 치르고 난 뒤 선생님은 교과서를 나누어 주었다. 교과서는 인쇄 냄새가 채 가시지않은 새 책 특유의 냄새가 촌놈 콧속을 이상야릇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아버지는 선생님이 나누어 준 교과서들을 책보로 둘둘 말아 싼 뒤 내 어깨에 매주었다. 교과서를 받아 들고 설레는 맘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에 가서 얼른 책들을 펴 보고 싶은 마음에 강변 오솔길을 내달리며 나는 줄곧 아버지 앞에 앞서왔다.

ⓒ 전라도닷컴
3월 초 새 학기가 시작되면 교과서를 나누어 준다. 새 교과서를 받아들면 나는 언제나 책을 코에 대며 냄새를 맡아보곤 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코를 가까이 대면 새 책 특유의 냄새들이 풍겨왔는데 그 냄새를 맡는 게 나는 너무 좋았다.

선생님께서 새 교과서를 나누어주면 행여 침 자국이 남을까봐 손에 침을 묻히지도 않고 주르륵 책장을 넘기며 소중히 아끼던 빳빳한 교과서들. 형들은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 언제나 두꺼운 달력종이로 씌워서 표지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싸주었고 앞면 겉 표지에 이름을 써주었다.

소중하게 다루던 교과서들을 책보에 말아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집으로 돌아오던 섬진강 강변 길. 강변 길을 지나 오다 보면 강변을 계속 따라 가는 길이 있고 지름길인 봇도랑 길로 가는 두 갈래 길이 나온다.

봇도랑 길은 이웃 마을인 일중리 마을 앞에 설치된 봇물을 진뫼마을 앞 논배미에 물을 대주기 위해 만들어진 수로의 둑길이었다. 수로를 설치하기 위해 방벽을 쌓아 놓은 좁은 둑길을 따라 우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논 다랑이 아래쪽 두렁을 따라 만든 수로 방벽은 고부라진 길이었다. 그러나 우린 몇 발자국이라도 덜 걸어서 집으로 빨리 가기 위해 봇도랑 길을 택해서 가곤 했다.

책보 메고 가는 내 아들과 딸(몇 년 전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까지 '책보 매고 가는 길'을 체험 시켰다)
책보 메고 가는 내 아들과 딸(몇 년 전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까지 '책보 매고 가는 길'을 체험 시켰다) ⓒ 김도수
초등학교 2~3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봇도랑 길을 택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노랑나비 한 쌍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날고 있었다.

좁은 봇도랑 길에 만난 노랑나비 한 쌍. 긴 겨울을 나고 처음으로 본 나비가 신기해 우린 나비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 노랑나비는 멀리 도망을 가버리고 맨 앞쪽에 달리던 아이가 계속해서 달리자 뒤따르던 아이들도 덩달아 달렸다.

그런데 뒤따라 달려오던 길용이가 “내 책, 내 책”하며 봇도랑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책보를 둘둘 말아 싼 뒤 어깨에 둘러매진 교과서들이 책보가 풀리면서 봇도랑 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길용이는 봇도랑 속으로 빠진 책들을 주우며 엉엉 울고 있었다. 책보에 책들을 둘둘 말아 싼 뒤 맨 마지막 끝을 옷핀으로 고정시킨다. 그런데 길용이는 옷핀이 없어서 채우지 못했던지 책보 끝 단이 풀리면서 그만 책들이 주르륵 흘려내려 봇도랑 속으로 빠져 버린 것이다.

길용이 책보는 무명으로 된 옷감이 아닌 ‘다후다’로 된 미끄러운 옷감이었다. 가볍고 구김이 잘 가지 않는 값싼 옷감이었던 다후다는 질기지만 열과 불에 약하고 책을 싸면 미끄러운 게 흠이었다.

새 책 냄새를 맡으며 침도 바르지 않고 들춰보던 교과서. 그 책들이 봇도랑 속으로 빠져 버렸으니 길용이는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길용이는 흙탕물이 묻은 책을 책보로 닦으며 엉엉 울고 있었다.

ⓒ 전라도닷컴
우린 봇도랑 속으로 빠진 현철이 책들을 한 권씩 나눠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햇볕에 말리며 왔다. 속이 상한 길용이는 마을 앞에 다다를 때까지 내내 울면서 왔다. 길용이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함께 걸어오던 우린 불쑥 날아든 노랑나비가 미웠다.

나비는 멀리 도망을 가버리고 봇도랑에 빠진 책들을 봄 볕에 말리며 책을 한 권씩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용소강변 봇도랑 길. 지금 용소강변 봇도랑 둑길은 경지정리로 사라지고 대신 시멘트로 만든 봇도랑이 진뫼마을 앞 논배미에 물을 대주고 있다.

봄이면 새 교과서를 받아 들고 혹시 침 자국이 남을까봐 침을 바르지 않고 주르륵 책장을 넘기던, 인쇄 냄새가 채 가시지 않는 새 책 특유의 냄새를 맡아보던 가슴 설레던 빳빳한 교과서들.

그 교과서가 봇도랑 속으로 빠져 울던, 책보를 어깨에 둘러매고 나비를 쫓으며 달려오던 용소강변 봇도랑 길은 이제 사라지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도 그 봇도랑 길에서 사라졌다.

올 봄에도 용소강변 봇도랑 길에 어김없이 예쁜 나비들은 날아 들겠지. 노랑나비 한 쌍, 훨훨 날며 찾아오겠지.

덧붙이는 글 |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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