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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변덕이 심하다더니,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이곳 경남 합천, 원경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적중면 황정리 벌판엔 주룩주룩 봄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말끔히 개어 슬금슬금 올라오는 봄기운을 느끼었다가, 오늘 아침에는 때 아닌 눈발이 세찬 바람과 함께 흩날려서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현장학습을 떠난 2학년 담임선생님 중 한 분이 보성 녹차밭에 눈이 내려 별천지가 되었다며 문자를 보내온 것을 보면 합천뿐 아니라 전라도는 더한 모양입니다. 추운 겨울을 지내며 만물의 갈망 속에 다가오는 봄이 어찌 그리 녹록히 오기야 하겠습니까? 필경 꽃샘추위에, 봄눈에, 때 아닌 바람에,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변덕은 나쁜 말이 아니라, 한자 뜻풀이대로 "변화하는 덕"임에 분명합니다. 변함으로써 덕을 베푸는 천지자연의 이치가 담긴 말이 아닐는지요.

대안학교도, 대안교육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그 도정에 놓여, 아픔과 평온, 슬픔과 기쁨, 눈물과 웃음, 분노와 사랑의 변덕 속에서 뒤척이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교실이데아
ⓒ 예담
3월 22일부터 24일까지 원경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년별로 모두 현장학습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 2박 3일간 학교를 지키면서 원경고등학교 개교 첫 해를 현장 기록한 책 <교실이데아>를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최병화 씨는 1997년 개국한 iTV의 피디로서 1998년에 개교한 경남 합천의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직접 촬영한 다큐멘터리 <내일은 태양>으로 '99방송위원회대상에서 '올해의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상'을 수상했고, '제11회 한국프로듀서상'을 포함한 4개 부문에 걸쳐 수상함으로써 원경고등학교 취재는 저자에게 상당한 행운을 안겨주면서 매우 깊은 인연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교실이데아>는 원경고등학교 학생들과 개교 첫 해를 직접 생활하면서 겪은 일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어떤 비평도 가하지 않고 아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그 동안 '문제아'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어 거부했던 십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저자가 만난 아이들을 어떤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고, 규정 당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며,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듯' 아이들을 만났고, '그것은 20년 전 가슴 아팠던 내 스무 살의 아침을 스스로에게 돌려받는 고독한 의식이기도'하였다며 동병상련의 아픔과 연민을 술회하였습니다.

추천의 글을 쓴 소설가 이호철씨도 '그는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삭풍 부는 벌판에서 홀로 선 삼십대 프로듀서와 53명의 아이들, 그가 그곳에서 보았다는 십대에서 삼십대를 관통하는 그 아픈 절망의 단초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듯이, 당시 원경의 아이들은 젊은 날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으며, 그래서 더욱 절망과 희망을 함께 얘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매우 충격적입니다. 남학생 몇이 주동이 되어 학교 교실의 유리창 189장을 깨뜨리는 '폭동'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퇴학당하거나 정학 당한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폐교된 적중중학교를 인수하여 서둘러 학교를 개교한 원경고등학교는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황량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원경고등학교를 '아름다운 유배지'라 하고 그 곳에 모여든 아이들을 '아데프트의 야생마'라 부르며 입학을 위해 모여드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만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맞이하는 15명의 선생님들, 그 중에 여 선생님이 10명이나 되고 대부분이 초임 교사인 이 희한한 교사진들은 오직 특별한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교육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입학식 일주일 전부터 모여서 오리엔테이션을 하였지만 첫 수업을 5분도 못 넘기고 교실을 나가버리던 아이들, 첫 주말, 첫 외박을 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초조해 하던 선생님들, 반 이름을 오뚝이반, 해바라기반, 제일반, 비트반 등으로 짓고 설레던 아이들, 자기의 마음을 멈추고 살피는 마음공부를 받는 아이들, 선생님들의 간절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울분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자해를 하는 아이들, 마을 어르신들을 초대하여 돼지를 잡아 대접하며 마을 주민들의 양해를 구하는 학교.

술과 담배를 허용하여 오직 아이들의 자율에 맡겨서 개선하려고 시도했던 선생님들, 그러나 그 자율이 버거워 주저앉고 절망했던 아이들, 사랑과 갈등, 질투와 번민 속에 서로를 상처주고 아파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속에서 점차 지쳐갔던 선생님들, 다시 규율을 정하고 그 규율에 따라 학교를 울면서 그만두어야 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가슴을 쳤던 선생님들. 그리고 마침내 첫 졸업생 8명을 졸업시키면서 졸업식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던 그 눈물의 기록들이 <교실이데아>에 생생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교실이데아>는 결국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아들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사랑의 충만 속에, 불행한 사람은 사랑의 부재와 결핍 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은 곧 사랑임을, 아이들에게 줄 것은 사랑밖에 더 없고, 오직 사랑만이 교육의 시작이요 완결판임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교실이데아>를 읽는 동안 몇 번씩이나 고이는 눈물을 훔치며, 저는 새삼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 뼈저리게 느꼈고, 저 역시도 9년 전에 영산성지고등학교에서 대안교육을 시작했던 사람이지만, 척박한 원경고등학교에서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대안교육의 첫발을 내디뎠던 선생님들에게 일어나는 존경의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개교 때부터 고군분투했던 여러 선생님들과 원경고등학교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원경고는 그 때와는 너무나 달라져서 시설이나 제도나 체제나 학생들이 무척 안정되어 대안교육의 지평을 더욱 넓게 열어가고 있지만, 그 바탕엔 그 때 그 선생님들의 열정과 사랑이 있으며,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학교의 앞길을 이끌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개교 초기 학교의 모습이 방송에 나가고 <교실이데아>가 발간되면서 원경고가 문제아 학교로 인식되어 학교의 이미지가 나빠졌다고 하지만, 그 때 그 교육이 과연 옳았느냐? 또는 성공했느냐? 물려준 전통이 무엇이며, 후유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떠나, 교육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품어 안고 사랑과 기다림의 교육을 펼쳤던 그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대안교육의 역사였습니다.

교실 이데아 - 대안 학교에서 만난 바람의 아이들

최병화 지음, 예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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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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