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임을 강조하는 독립운동가 조문기(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선생의 회고록이 나왔다. 일제강점기 말기 '부민관 폭파사건'을 통해 일제와 친일민족반역자들의 두려움에 떨게 했던 조문기 선생이 팔순을 맞아 출간한 책 <슬픈 조국의 노래>(민족문제연구소 발행)가 그것이다.
<슬픈 조국의 노래>에는 진정한 해방을 위해 싸워온 선생의 생애와 연결된 곡절 많았던 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선 이 책엔 조문기 선생이 직접 겪은 친일민족반역자 송병준 일가와의 악연과 남한만의 '단정(단독정부)'을 반대한 인민청년군 사건을 비롯해, 이승만 암살 정부 전복 음모 조작사건, 성시백 사건, 민족민주청년동맹사건 등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서술돼 있다.
그 중 1948년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이 친일경찰들을 내세워 남북협상파들을 체포 고문하는 등 노골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경고하려 했던 인민청년군 사건을 보자.
인민청년군 사건은 조문기 선생이 동지들을 모아 삼각산(흔히 북한산이란 함) 6개소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하는 동시에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 고층빌딩 수십 곳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등의 글이 적힌 현수막을 펼친 후, 공중에 총 몇 발을 쏘는 평화적인(?) 무력시위를 하려 계획한 사건이었다.
단정수립을 반대하는 막강한 무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 이승만과 미군정이 노골적으로 남북협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조직에 숨어든 프락치에 의해 발각됐고, 체포된 조문기 선생은 경찰서 취조실에서 일제 때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을 당했다. 해방됐다는 조국에서 악랄한 친일 경찰에게 대못이 박힌 각목으로 맞아 못이 몸 속으로 쑥쑥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하며 선생은 "분통 터지고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토로한다.
아울러 이 책엔 10대 중반 독립운동에 투신해 2005년 현재까지도 "진정한 독립을 위해 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선생의 친일판 청산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함께 독립운동계에 대한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도 들어있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간다."
광복절이면 오히려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산이나 바다로, 펄럭이는 태극기와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한다는 조문기 선생.
선생은 그 이유를 "1945년에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들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운동자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는 지적이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대해 선생은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고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며 울분을 토한다.
하지만 이 책이 현실에 대한 답답함만 담고 있진 않다. 독립운동가와 만나 평생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아내에 대한 애틋한 감정 표현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10대 중반 독립운동에 뛰어든 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상태로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거칠고도 험난했던 삶으로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끔찍한 역경도 많이 체험"했던 선생은 말한다. "후회는 없다"고.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과 과거청산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현실에서 친일파 청산이 왜, 얼마나 중요한 지 절절이 증언하는 <슬픈 조국의 노래>를 만나게 돼 너무 기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5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회고록 출판기념회를 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 [참말로](www.chammalo.com)에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