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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안타깝고 아내에게는 미안하고 아들은 짠하다

해 기울어 날은 어둑해지고 바람이 서늘합니다. 맑은 공기와 환한 햇빛이 찰랑거리면 마음 속 상념이란 것들도 부서져 흩어지지만 지금처럼 날씨마저 우중충해질 때면 켜켜이 쌓여 있던 묵은 생각들이 새롭게 돋아납니다.

▲ 2004년 8월 작은형네와
ⓒ 김지영
어머님, 아버님 보우하사 세상에 나고 자랐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학교시험에도 숱하게 나오고 그랬지만 그런 거와는 무관하게 본능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부모님이 제게 주신 사랑을 살아가면서 갚아나간다는 생각을 하는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자식도 되어 보고 부모도 되어보니 조금은 그 마음 들을 이해할 듯도 싶습니다.

역지사지가 진정으로 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내공이 아닐 겁니다. 더군다나 돈이나 애정행각을 가지고 따지는 입장도 아니고 부모와 자식의 입장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같지만 그 색깔은 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그 색깔이 또 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친한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지요. 기분이 좋아 평소 잘 못하는 술을 제법 마셨습니다. 택시 타고 집에 왔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지요.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더군요. 씻고 뒷정리하고 피곤한 몸을 누이려고 침실 방을 열었는데 모자(母子)가 지친 하루를 보냈는지 제가 온 줄도 모르고 색색거리며 혼곤한 잠에 취해있습니다.

▲ 2005년 2월 집에서
ⓒ 김지영
엷은 불을 켜고 아내와 아들의 혼곤한 얼굴을 불그레한 얼굴로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언젠가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숱하게 그래 봤을 겁니다. 화장을 지운 아내의 왼쪽 광대뼈와 눈가 주위로 거뭇하게 기미가 잔뜩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맨 얼굴의 사진을 찍으면 그 부분에 저승꽃처럼 꺼멓게 되어 보였나 봅니다. 어머니의 해마다 늘어가는 주름을 볼 때는 속상하고 화나고 그랬는데 아내의 그 기미 낀 얼굴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오래 전 아들이 이십 개월이 채 안되었을 무렵 수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엄마 아빠나 겨우 말할 줄 아는 어린 것을 전신 마취 실에 들여보낼 때의 그 착잡함이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일주일 입원실에 있으면서 ‘자식 아픈 것은 못 보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자식은 항상 가슴에 묻어 놓고 시시때때로 꺼내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무렵 저는 어머니를 떠나 왔지요.

그래도 장가들기 전 어머니와 같이 살 때는 무뚝뚝하기만 한 아들 오 형제 중에 원래 여자 몫으로 넷째인 제가 좀 수다스러우면서도 살가웠지요. 어릴 적부터 갖은 심부름도 다하고 설거지에 방 청소까지 일상적으로 꾸준하게 거들었던 것은 저였으니까요.

그랬던 제가 지금은 문안 전화조차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아들은 장가들면 지 마누라 밖에 모르나 보다’라고 서운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사실입니다. 아들 몫이 더 크긴 하지만 제가 유별나서가 아니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족을 만들면 어차피 전에 가졌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애달픔으로만 바뀌기도 하는 가 봅니다.

부모가 되어보지 못했을 때 느낄 수 없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들과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가지게 되는 특별한 감정들이 다시 내가 내 어머니의 품에 자식이었을 때를 자연스럽게 되돌려 보기도 합니다.

▲ 2005년 3월 집에서
ⓒ 김지영
내가 지금 내 자식을 보는 마음이나 지금 어머니가 저를 보는 마음이나 매 한가지 일 것인데 우습게도 제 마음이 자식에게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늙어 가시는 모습을 보면 많이 속상합니다. 마음껏 챙겨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이겠지요.

술 한 잔 걸치고 바라본 아내와 아들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모두가 피붙이로서 가지는 본능적 사랑의 자연스러움인가 봅니다. 비록 그 색깔과 농도가 다른 빛깔과 짙음으로 가슴에 쌓여 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사람의 일생에서 결코 가슴 한편으로 밀려날 수 없는 태생적인 갖춤이겠지요.

이른 나이에 홀로 되셔서 다섯 아들 교육시키고 크게 사회에 벗어나지 않는 어른들로 키우셨습니다. 지금 제가 제 자식을 바라보고 애면글면 하는 것처럼 어머니도 다섯 아들 모두를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셨겠지요.

술 한 잔의 취기를 빌어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는 저의 이런 치기어린 생각들마저도 밤이 깊어지는 만큼 진실이 되어 갑니다.

초저녁에 시작된 저의 상념들이 어느새 창문 밖으로 구름에 달도 가려져 칠흑 같은 어둠에 쌓였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왔지만 저녁 바람은 아직은 서늘합니다.

아내와 아들은 지금 제 곁에 누워 편안하고 곤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 곳 서울 양재동에서 250km를 달려야 하는 전라도 땅 시내를 벗어난 원룸 아파트 한쪽으로 온종일 가슴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자식들 생각으로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 어머니의 혼곤한 잠자리가 떠오르는 것은 제가 아직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딸 같은 아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저는 불효하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넷째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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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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