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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원구단 전경. 왼쪽에 황궁우의 팔모지붕이 보이고 오른쪽에 조선호텔이 보인다.
국가사적 원구단 전경. 왼쪽에 황궁우의 팔모지붕이 보이고 오른쪽에 조선호텔이 보인다. ⓒ 박신용철

'…당시는 아관파천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더욱 강화되던 때였다. 이에 맞서 고종은 대내외에 자주독립국가임을 새롭게 다짐하였고 국호를 고쳐 대한제국이라 하고, 국왕의 호칭을 황제라 하였다.

고종은 이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이곳 남별궁터에 원구단을 쌓고 같은 해 10월 11일 백관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천신에게 친히 제사를 지낸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 원구단은 자주독립을 지키려던 조선왕조의 의지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그 때문에 조선을 병합한 일제는 1913년 이 원구단을 철거하고 그 터에 호텔 건물을 세웠다.'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번지에 위치한 원구단 안내판 내용의 일부다. 원구단은 근대사에서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원구단은 조선호텔 정문을 스쳐 지나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데 현재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출입문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필자가 문화유산연대와 두 차례에 걸쳐 현지 답사한 결과, 근대사의 출발지이자 자주적 주권국가를 선포했던 원구단이 무너지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울어짐이 가장 심각한 곳은 서울시에서 조성한 원구단광장에 맞닿은 곳이다. 황궁우 판석과 석고에서도 뒤틀림과 주저앉음 현상이 확인되어 대대적인 정밀안전진단과 보존대책 수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기울어짐이 가장 심각한 곳은 서울시에서 조성한 원구단광장에 맞닿은 곳이다. 황궁우 판석과 석고에서도 뒤틀림과 주저앉음 현상이 확인되어 대대적인 정밀안전진단과 보존대책 수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 박신용철
항궁우를 둘러싸고 있는 난간석이 바깥쪽으로 쓰러지고 있었고 일부는 석재가 틀어져 틈이 벌어진 곳도 있었으며 지반 침하로 인해 둘레석의 높이가 맞지 않아 계속적으로 훼손이 되고 있었다.

석재 일부는 깨어졌으며 두 기둥 사이에 제자리도 아닌 석재를 올려놓은 부분도 발견되었다. 심지어 쓰려지려는 둘레석에는 철제 구조물로 버팀목을 만들어 세워놓았는데 석재와 간격이 맞지 않아 벌어진 틈에 또다시 나무토막을 끼워 넣기도 했다.

난간석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궁우의 박석 부분에서 뒤틀림 현상이 확인되었고 석고에서도 주저앉고 있었다. 특히 원구단 시민광장과 맞닿아 있는 곳의 난간석 기울림 현상이 심각했다.

김성한 문화유산연대 사무처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난간석이 쓰러지는 현상은 확인되지 않았다”며 “매번 ‘땜빵식’ 유지보수공사만 반복하다가 주변공사로 인한 영향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원구단은 복원 직후부터 석재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등 부실 복원이 문제점으로 누누이 지적되어 왔으나 단 한 차례도 정밀조사를 통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서울시 중구청은 지난 2월 원구단 난간석이 기울어지자 철제 버팀목을 임시방편으로 설치했다.
서울시 중구청은 지난 2월 원구단 난간석이 기울어지자 철제 버팀목을 임시방편으로 설치했다. ⓒ 박신용철
원구단 일대는 현재 한국관광공사 소유로 되어 있는데 1963년 12월 31일 ‘정부 현물출자’로 취득한 것으로 관리는 서울시·중구청에서 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상 국가 사적의 보존관리책임은 문화재청과 해당 지자체에 있다. 그러나 국가 사적인데도 문화행정당국은 안일한 대처로 일관해왔음이 드러났다.

해당 지자체인 서울시가 시행한 원구단의 최근 보수공사는 2001년 기와 등 주변유지공사와 2002년 잔디와 바닥공사를 한 것 이외에는 진행된 적이 없다. 올해도 서울시는 원구단 유지보수를 위해 7천만원(국비 4900만원, 지방비 2100만원)을 책정해 놓은 상태다.

서울시 문화재과 김버들 학예사는 “7천만원을 책정한 것은 (원구단이) 국가지정문화재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보수비가 나오면 7:3 비율로 시비가 책정되는 것”이라며 “국가예산이 책정되었기 때문에 예산이 책정된 것이지 특별한 이유에 의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문화재과 김태경씨는 원구단 난간석이 기울어지고 있는 문제를 거론하자 “해빙기에 일어날 수 있지만 현장검점을 해 문제가 확인되면 긴급보수를 한다”며 “팀 개편 와중에 있어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확인을 해서 문제가 확인되면 긴급 보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 서울시는 25개 구청에 해빙기 안전점검을 지시해 시행 중이다.

원구단은 복원부터 잘못되었다. 그러나 한차례도 제대로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사진은 잘못된 복원에 지반침하로 난간석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원구단은 복원부터 잘못되었다. 그러나 한차례도 제대로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사진은 잘못된 복원에 지반침하로 난간석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 박신용철
원구단 관할 구인 중구청은 지난 2월경 난간석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조치로 철제구조물을 설치했지만 이후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유지보수 예산이 전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 중구청 문화체육과 유아무개씨는 “난간이 기울어지는 것은 해빙기에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흙이 빠져나가 발생하는 것 같다”며“응급처지를 해놨는데 보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털어놨다.

현재 원구단 난간석과 뒤틀림현상이 가속화되어 훼손될 위험성이 가중되는데도 정부의 대응은 소홀하고 토지소유자인 한국관광공사나 국가 사적을 뒷뜰처럼 사용하고 있는 조선호텔측도 외면하고 있다.

기존 난간석도 지반침하로 수평이 맞지 않고 뒤틀어지고 있다.
기존 난간석도 지반침하로 수평이 맞지 않고 뒤틀어지고 있다. ⓒ 박신용철
원구단의 복원, 보수과정의 문제는 매년 불거져 나왔다. 2003년경에는 조선호텔측에서 출입문 복원공사를 원형에서 벗어난 형태로 진행한 것이 지적되자 문화재청은 진상조사를 통해 출입문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이를 계기로 원구단 보수, 복원에 대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사적과 관계자는 “원구단 자체가 조선호텔이 들어서 훼손이 심한 상태여서 원형 복원은 곤란하다”며 “현재로서는 (원구단 보수복원) 종합대책은 세워진 것이 없다”고 밝혔다.

심지어 서울시는 1967년 7월 15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원구단 앞을 2000년 10월경 ‘원구단 시민광장’으로 지정해 도심공원으로 전락시켰다. 문화재보호법은 사적은 최대 500m까지 보호구역을 설정하여 문화재에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문화재청 사적과 권아무개씨는 “원구단의 국가지정 당시 남아 있는 부분을 감안해 문화재보호구역이 설정되었다”면서 “황궁우, 석고만 지그재그로 설정되어 있어 사실상 보호구역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광장에서 원구단을 바라보면 인공폭포가 조성된 원구단 광장 뒤편으로 황궁우의 지붕이 보인다. 대다수 시민들은 그곳에 대한제국의 출발지인 원구단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 사적은 보존도 중요하지만 ‘문화유산 향유권’ 차원에서 전경이 잘 드러나도록 조치해야 한다.

실제는 이곳이 삼성생명보험(주) 소유의 신사옥 건축 예정부지였는데 서울시가 2000년 9월 135억9700만원을 들여 매입해 광장을 조성했다. 문화유산 보존관리 책임이 있는 서울시는 보호구역이 아니라 하더라도 원구단의 보존을 위해 최대한 행정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게 문화유산운동가들의 주장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발 일변도의 시책에서 문화유산 훼손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런데도 서울시는 보호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원구단과 2m 정도 떨어진 거리에 광장을 조성했고 심지어 2002년에는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원구단 열린 문화마당이 계획돼 있는 도심 속의 휴식공간 원구단시민공원을 4월의 명소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국가사적으로 외국인들의 방문이 찾은 원구단 안내판에는 '세롭게(새롭게)', '다짐하여고(다짐하였고)' 등의 오기도 눈에 띄어 관리 실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원구단은 1897년 고종황제가 ‘근대적 자주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을 공식 선포한 자리다. 구한말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때 고종은 경운궁을 법궁으로 삼고 원구단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종묘사직에 대한제국 수립을 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구단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김성한 문화유산연대 사무처장은 “일본의 독도점유건, 다케시마의 날 제정 등으로 정부와 시민사회가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구한말 등 한국 근대사와 관련한 문화유산의 보존상황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면서 “일제시대와 관련한 건축물, 문화유산 등에 대해 전반적인 조사를 벌여 관리보존상황을 점검하고 대책을 시급히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이어 “원구단 전체의 기반 침하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어 조속한 정밀진단을 바탕으로 보존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근대사의 출발지인 원구단은 어떤 곳?
일제가 대부분 파괴...남아 있는 일부도 제대로 보존 못해

▲ 원구단 출입문. 조선호텔 뒤뜰처럼 사용되고 있어 일제에 의해 잘려진 아픈 상처가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박신용철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신변 위협을 느끼게 되고 1896년 정동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아관파천’이라 부르는 이 사건으로 정동이 한국 근대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고종은 아라사공사관에서 1년여를 머물면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미래를 고민했다. 당시 고종은 법궁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있던 경운궁(덕수궁)의 중건을 지시,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한다.

고종은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해 대내외에 근대적 자주국가임을 선언했는데 이런 사실을 하늘과 땅 그리고 종묘사직에게 고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게 되는 데 바로 이곳이 ‘원구단’이다. 원구단은 외세 열강의 침략 속에서 ‘주권국가’ 대한민국을 공식화한 역사적 공간이었다.

원구단은 원(圓壇)을 쌓아 그 위에 신위(神位)를 모시고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조선시대 내내 중국을 천자의 나라로 받들며 살아왔는데 고종이 천자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중화주의에 벗어난 자주적 국가로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김순일 부산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저서 <덕수궁>에서 고종의 경운궁 이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마침내 고종이 파천한 지 약 1년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에 이르는 길에는 친위대 병정과 순검들이 늘어섰고,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신문사 건너편에 정연히 늘어서서 만세를 불렀으며 어가(御鴐)가 지나가는 길에 꽃을 뿌렸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국가의 자주 독립을 기원하는 국민감정을 여실히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이기는 대한제국을 성립시키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이어한 해 8월 16일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반포했고 10월 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원구단 축조를 명령했다. 고종은 원구단을 쌓은 직후인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다음날인 12일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홍순민 명지대 객원교수는 저서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 “고종은 원구단에 나아가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드리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원구단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비롯하여 황지지(皇地祗), 대명(大明). 야명(夜明), 별과 산천 기타 제 신위를 모였다. 1899년에는 원구단 뒤편에 황궁우를 세워 신위판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여 배천(配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원구단에는 신위를 모시는 황궁우 외에도 고종 즉위 40년이자 연세가 51세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석고(石鼓)를 1902년 세웠다. 그러나 일제는 한일합병 이후인 1913년 원구단에 철도호텔을 세웠고 현재 조선호텔로 이어지고 있다. 민족정기를 끊으려는 일환이었다.

홍순민 교수는 “원구단은 거의 없어지고 황궁우와 석고만이 조선호텔과 프레지던트호텔 등 고층 빌딩 틈바구니에 끼여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황궁우는 굳이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한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 것조차 모르고, 외국인들만 조선호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아름다운 조선 정원’ 하면서 호텔 뒤뜰로 알고 내려다보는 구경거리가 되어 있다”고 한탄한다. / 박신용철

덧붙이는 글 | 박신용철 기자는 문화유산연대 정책실장(비상근)입니다.

블로그 '신새벽의 새꿈꾸기(http://blog.naver.com/storyrange.do)'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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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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