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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가 인용했던 바넷 뉴먼의 작품 중 <지금 II>
리오타르가 인용했던 바넷 뉴먼의 작품 중 <지금 II> ⓒ 바넷 뉴먼
세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일반에 붙이는 '신보수주의'라는 딱지, 후기 자본주의의 자기 정당화 논리라는 비아냥은 정작 리오타르 본인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듯하다. 50~60년대 극좌파 그룹에 활동한 경력이 있고, 68년 혁명에도 적극적인 발언을 했던 그의 정치적 프로필은 오히려 왠만한 맑스주의 계열의 학자들보다 화려하다.

그러나 리오타르가 정통적인 맑스주의에게서 비껴나 있으며 비판적 이성을 복권시켜 계몽의 기획을 되살리려 했던 하버마스 등과도 대척점을 형성했던 것은 그의 시대에 경험했던 일련의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낭만적인 역사주의의 슬로건이 참혹한 아우슈비츠의 참극에 의해 붕괴되는 '사건',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공산주의적인 것이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이라는 사회주의의 슬로건들이 의문에 부쳐지게 만든 노동자와 당의 충돌 '사건'(53년의 베를린, 56년의 부다페스트, 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민주적인 것은 국민에 의한 것이고, 국민에 의한 것은 민주적인 것”이라는 의회민주주의의 슬로건이 그에 포섭되지 않은 일상적 욕망들에 의해 한계를 노출한 68년 혁명 '사건' 그리고 부르주아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전반적인 번영을 약속하며, 전반적인 번영은 수요와 공급을 자유롭게 한다”는 낙관을 무너뜨린 두 번의 경제공황 등 일련의 '사건'들은 거대한 계획 아래 인간이 보다 나은 삶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근대의 '환상' 자체에 미련을 버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진보와 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이루어졌던 어떠한 시도도 '근대'의 계획에 내재한 보편성과 절대성, 통일성, 전체성의 강요 아래 결국 개별자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되게 됨을 리오타르는 확인했던 것이다. 더 이상 미래의 유토피아를 제시해 현재의 폭력을 무마하려는 근대의 거대 이야기들은 유효하지 않다.

자신의 보편타당함을 단선적이고 거대한 이야기 쓰기를 통해 정당화하는 근대에 대항해 리오타르는 후기의 비트겐슈타인, 그의 언어게임 이론을 인용한다. 그 유명한 언어게임 이론이란 이런 것이다. 예컨대 '개의 자손'이라는 말은 학술적인 모임에서와 술자리 모임에서 전혀 다른 의미와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순진한 동물학자는 술자리에서 개맞듯이 맞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하듯이 '보편적인' 의미란 존재하지 않으며 의미란 '개별 언어게임의 용법(use)'일 뿐이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인데, 이 주장을 보다 급진화시켜서 그는 말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규칙체계에 종속되는 문장의 섬들일 뿐이다. 그래서 한 규칙체계를 따르는 문장(예컨대 지시적 문장)을 다른 규칙체계에 종속되는 문장(평가적, 규범적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문장의 규칙체계들간에는 불가공약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52쪽)"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도 이런 저런 사실을 가지고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에 대한 문장과 가치 판단의 문장은 서로 다른 규칙체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언어게임, 역사적 언어게임, 미학적 언어게임들도 각기 다른 규칙체계일 뿐 근대의 계획처럼 이들을 연결한 거대한 정당화 이야기로 묶어내는 것은 '초월적 환상'의 산물일 뿐이다.

서로 다른 규칙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테러'의 방법 외에는 불가능하다(우리 가까이의 예로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난해 있었던 '대통령 탄핵 가결 사태'를 우리는 기억한다. 절차적으로 정당한 이 '탄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었는지. 의회 민주주의의 절차상의 성공이 그 이념상의 성공과 얼마나 큰 '괴리'가 있었는지…).

그렇다면 '테러'를 저지르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직 '현실', 확실히 이해가능하고 지향이 분명한 그런 거대한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환상 안에서만 우리의 사유와 행동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현될 수 없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암시를 창안해낼 수 있다.

그가 찬양하는 '숭고'의 미학을 통해, 아방가르드의 작업을 통해 이를 이해해볼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작업의 기본이라고 생각되던 과거 예술의 규칙들과 구성 요소들을 의문시하며 쾌락이나 윤리적 의식이 목적이 아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데서 강렬한 효과를 갖는다.

그는 바넷 뉴먼이라는 작가를 '숭고와 아방가르드'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길게 인용한다. 여기 지금 미래와 과거에 흡수되지도 않고 의식에 의해 알려지지도 않고 구성되지도 않은 무엇이 벌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일어나고 있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며 그것이 '숭고'한 것이다.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뜻을 알 수 없는 색면화나 수직의 직선을 보며 감상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규모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에 전율한다. 아방가르드의 작업은 이 '숭고'를 증거하기 위해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결합을 계속하는 것이다. '비규정적인 것', '현시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증언하기 위하여!

근대의 거대 이야기와 싸워나가기 위해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작업처럼 삶의 형태들의 '불가공약성'을 드러내고 '현시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문제화해야 한다. 그리고 근대의 거대 이야기에 맞서는 '미세 이야기'들과 '작지만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내며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리오타르는 주장한다.

보편적인 규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연결은 '우연적'이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시켜줄 어떤 판단 규칙도 '오만'일 뿐이다. 다른 연결가능성을 배제하는 연결은 그 가능성에게 필연적으로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다른 규칙체계를 갖는 담론 장르의 연결은 항상 갈등상황과 충돌을 야기한다.

메타담론을 통해 이 충돌을 예방하는 길은 앞서도 말했듯이 부재한다. 우리가 취할 길은 이 '충돌을 증언하는 것'이다. 지배담론에 의해 침묵하고 있는 소수의 담론을 해방시키고, 분쟁들을 증언하는 것, 이것이 리오타르가 생각한 근대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리오타르는 모든 잘못을 '근대'라는 단어 하나에 몰아붙이고는 쉽게 그것을 넘어서버리는 빈약한 성찰의 '탈근대주의자'인가? 탈근대주의자라는 말에 리오타르는 아마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반박할 것이다.

개별자를 억압하는 거대계획으로서의 근대에 대해서는 그는 철저한 '청산'을 주장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에는 전통의 권위에 도전하고, 근대 문명의 상실을 슬퍼하고 절대적 통일체를 파편화시키는 비판적인 모더니티 역시 존재한다. 리오타르는 그런 모더니티에 관한한 열렬한 계승자이다.

그는 근대를 결코 '망각'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망각'은 또 다시 지난 날의 과오를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의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실패한 계획을 증언하고 비판적으로 노정함으로써 모던을 기억하고 모던을 진정한 의미에서 '청산'하려는 작업이다(우리는 '망각'을 '극복'이라고 생각하는 이웃나라 때문에 지금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웃나라에게도 리오타르가 생각했던 'post-'의 의미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는 건 어떨까?).

"이렇게 파악된 포스트모던의 'post-'는 컴백, 플래시백, 피드백 운동, 즉 반복 운동이 아니라, 분석, 상기, 재생, 변형의ㅡ원초적인 망각을 완수하는ㅡ'아나(ana-)'의 과정을 뜻한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할 것이다.(68쪽)

덧붙이는 글 | <지식인의 종언>은 완결된 하나의 책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고 리오타르가 여기 저기에 썼던 에세이들을 국내에서 편집해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깊이를 구하기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해 폭넓은 리오타르의 글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장점이겠다.


지식인의 종언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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