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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로의 초대> 책표지
<중세로의 초대> 책표지 ⓒ 이마고
흔히 '믿음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에서 비롯되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세의 물질적 풍요와 안락에만 탐닉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울러, 종교재판과 마녀 화형, 기근과 페스트, 기사와 혹사당하는 농부들, 언제나 서로 싸우는 왕들과 주교, 이해할 수 없이 큰 대성당과 좁은 도시 등 부정적인 모습으로 떠오르는 중세가 과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단지 '암흑의 시대'였을 뿐인가 하는 의문을 떠오르게 만든다.

독일의 중세 사학자 호르스트 푸어만의 <중세로의 초대>는 바로 그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쓴 중세 안내서이다. 특히 차기 교황에 누가 선출될 것인가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요즘, 이 책은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회의인 '콘클라베'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어 흥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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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는 1000년이란 긴 시간에 걸쳐 있기 때문에 다채롭고 우연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중세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 역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방식보다는 다채롭고 우연적인 방식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 <중세로의 초대>가 따르고 있는 방식이다.

즉, 전혀 관련이 없는 기묘한 주제들을 나란히 끄집어내어 다루는 중세적 문제 취급 방식인 '임의의 문제제기' 방식처럼, 이 책의 구조도 '중세에서 가장 중세적인 것'들을 보여주는 키워드들을 골라 그를 통해 중세라는 큰 그림을 읽을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가장 기본적인 중세의 키워드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神)'을 들 수 있다. 중세인들은 '지구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을 자신의 삶과 세계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 책의 제1부에서 다루고 있는 이러한 중세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르면, 자살은 살인보다 더한 죄악이며 탄생일보다 사망 날짜가 더 중요하다.

중세인들에게 있어 자살은 은총 받을 기회마저 스스로 앗아버리는 행위로서, 예수를 배반한 사도인 이스카리오트의 유다야말로 자살한 사람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또한 현세란 단지 내세, 즉 신의 왕국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러 가는 곳에 불과하기에 탄생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야말로 기억할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유럽의 기초를 닦은 서양 최초의 왕인 카를 대제의 경우에도 사망날짜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탄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황제 위에 군림하는 강력한 교황권을 주장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나 왕보다도 더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자 공작 하인리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손꼽히는 이 세 인물들의 생애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제2부에서 우리는 권력의 중심에도 신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중세의 키워드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교황'이다. 중세의 교황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종교권력을 대표하는 교황과 세속권력을 대표하는 황제 사이에는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하느냐를 두고 끊임없이 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당한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결국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참회한 카노사 사건이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중세의 긴 기간 동안 교회는 제국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교황의 선출은 아주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황에 대한 암살과 독살 사건이 적잖이 벌어졌으며,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국가나 황제가 옹립한 두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던 시기도 있었다.

1059년 주교회의에서 선거인단이 된 추기경들이 비밀회의를 열어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교황을 선출한다는,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는 교황선출의 기본 원칙이 결정되기 전까지 교황 선출을 둘러싼 권모술수와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제3부에서는 그 굴곡진 역사와 함께 교황의 성스러움이 개인적인 자질이 아니라 그 직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흥미로운 내용도 담고 있다.

하지만 교황이 황제까지 굴복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 단순히 신의 대리인이라는 그 직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가능케 한 문서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고 불리는 문서이다.

이것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경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여러 의식의 권리, 영토, 군주의 권리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넘겨주었음을 알려주는 문서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중세의 교황은 종교권력뿐만 아니라 세속권력까지 손안에 쥐게 된 것이다.

그런데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역사적인 문서가 8세기 후반에 로마의 성직자들이 제작한 가짜 문서라는 점이다. 중세에는 이보다 더한 위조도 있었다. 오늘날의 교회법에도 여전히 효력을 미치고 있는 중요한 문서인 <가짜 이시도루스 교령>은 9세기 중엽에 초기교회와 초기교회 교황들의 편지를 대부분 날조하여 만든 것들이다.

<중세로의 초대> 중에서
<중세로의 초대> 중에서 ⓒ 이마고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쩌면 중세의 문서 전체가 위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당시의 위조 문제는 심각했으니, '위조'는 중세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키워드인 셈이다. '위조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4부는 '교황'을 다루고 있는 제3부와 더불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다른 어떤 시대보다 더 심각하게, 그것도 주로 성직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이러한 심각한 문서위조가 다름 아닌 독실한 종교의 시대, "믿음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중세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눈으로 보자면 이러한 위조는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과 교회에 봉사하기 위한 일이었기에 정당화되었고 위조 사실이 발각되었어도 그 효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즉, 중세는 신의 이름으로 위조가 공인된 시대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세의 마지막 키워드는 '축제'이다. 그러나 중세의 축제는 오늘날의 개념과는 많이 달라서, 축제일과 노동일로 구분되어 있는 달력에 따라 교회의 기념일이나 성인들의 축일을 조심스럽게 축하하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이런 종교적 축제일은 중세 초기부터 시작해서 세기가 지날수록 점점 늘어났으며,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32년에 교구 축제일을 빼고 85일간 노동 없이 신을 예배하는 날이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의 노동자가 누리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그리 적지 않은 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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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세는 신의 의지가 지상에서 관철된 시대이며, 중세인들은 죄의식과 신의 은총에 대한 희망에 깊이 사로 잡혀서 아주 헌신적이고 체념적인 삶을 살았음을 <중세로의 초대>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모습은 신의 자리를 이성으로 대체한 근대인들에게는 분명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평가절하하거나 아니면 동경에 가득 찬 신비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빌어 그런 편견과 몰이해에 맞설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중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비즈니스이지만 당시의 삶은 존재였다." 정말 가슴이 뜨끔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라는 말이 내게는 마치 마지막 중세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의미심장한 전언처럼 여겨졌다.

신을 몰아내고 텅 빈 자리를 온갖 재화로 채우기 위하여 쉴 틈도 없이 비즈니스에 열중하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중세인들보다 더 행복한가? <중세로의 초대>는 그 아픈 질문을 자신에게 물어보게 만드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중세로의 초대>(Einladung ins Mittelalter) 

ㅇ 지은이 : 호르스트 푸어만 (Horst Fuhrmann)
ㅇ 옮긴이 : 안인희
ㅇ 펴낸곳 : 이마고
ㅇ 펴낸때 : 2003년 12월 12일 초판 1쇄


중세로의 초대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안인희 옮김, 이마고(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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