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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로 친 고운 상토로 볍씨를 덮어줍니다. 혹여 듬성듬성 빠진 곳이 있나 살펴도 보고요
ⓒ 김혜경
지리산의 봄은 화사한 매화로도 오고 노란 생강나무 꽃으로도 오고 나무마다 두꺼운 겨울눈을 터뜨리는 여릿한 새잎으로도 오지만, 정작 봄이 오는 것은 들녘마다 갈아엎어지는 땅, 여기저기 분주해진 사람들의 손끝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봄 농사 준비가 한창인 마을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두고 싶었는데, 지나다보니 하황 마을 어른들 몇몇이 모판에 흙을 바삐 채우고 계십니다. 바쁜 분들한테 사진 찍으러 다가가기 미안해 쭈뼛거리며 사진 좀 찍고 싶다고 하니 어르신 한분이 "거 바쁜디 사진은 무슨, 꼭 놀러 다니는 사람같구로" 하십니다.

생각했던 대로 영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글쎄 말여요. 못자리하는 것 모르는 사람들한테 사진 찍어 좀 알려줄라고요. 좀 도와드리기도 하면서 찍는다 해야하는디, 바쁘신디 미안하네요." 젊은 아주머니가 환히 웃으시며 "그럼 낼 와요. 낼 못자리 할 거니까 낼 찍어야 어떻게 하는지 알지" 하십니다.

미안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그럼 낼 막걸리 사갖고 오겠다고 하자 논 주인인 듯싶은 어르신이 그냥 찍을 수 없다며 십만원 내고 찍으라고 농을 하십니다.

▲ 이미 불려놓아 싹을 틔우기 시작한 볍씨가 뿌려진 모판.
ⓒ 김혜경
다음날 아침, 막걸리 몇 통 사들고 모자 쓰고 트레이닝복 바지에 고무장화에 고무장갑까지 챙기고 일꾼 차림으로 하황 마을 논으로 갔습니다. "오매, 진짜 왔네?" 하시며 어제 뵈었던 아주머니 몇몇이 아는 체를 하십니다. 어제는 대여섯 분 일하시더니 오늘은 스무명 남짓 마을 분들이 총출동입니다. 막걸리를 꺼내놓자 진짜 막걸리까지 사왔냐며 웃으십니다. 십만원 내고 찍으라니까 막걸리로 때우려고 하냐며 아저씨도 껄껄 웃으십니다. 사진 찍으러 오긴 했지만 그래도 일꾼처럼 차리고 오니 밉지는 않으신 모양입니다.

▲ 모내기 공식 패션, 빨간 고무 롱장화!
ⓒ 김혜경
자꾸만 아니라 해도 무슨 취재라도 나온 듯이 '사진작가 선생'이라고 하며, 이것 찍어야지, 저것 찍어야지 코치를 하십니다. 나중에 사진 나오면 하황 마을회관 벽에 붙여드릴 테니 보시라 하자, 조장을 자처하고 계신 어르신은 원 젊은 사람 하나 없이 다들 칠순 넘은 사람들 자꾸 찍어 뭐하냐며 "사진 베린다" "벽 베린다"고 하십니다.

칠순을 넘으셨다고들 하셔도 일하시는 모습들로 봐서는 젊은이 부럽지 않습니다. 백발가를 흥얼대시던 할아버지는 이런 것도 얼마 안 남았다며 십년만 지나보라고 누가 하겠냐고 걱정을 하십니다. 정말이지 걱정입니다. 마을 청년회원이 젊은이가 없어 육십 다된 분들이 청년회를 하고 계신 시골의 현실이 농가부채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한해 농사가 못자리 만들기로 시작되는 만큼, 정성껏 불린 벼를 곱디고운 모판에 뿌려주고 다시 채로 친 고운 상토를 덮어줍니다. 사람이 일일이 뿌리지 않고 기계에 판을 대고 벼를 고루 뿌려줍니다. 행여 조금 빈틈이 있으면 아주머니들이 손으로 채우시기도 합니다. 내 일 네 일이 없이 정성스러운 손길입니다.

▲ 볍씨 뿌리는 기계가 다 있네요. 고루고루 뿌렸지만 그래도 기계 다음엔 사람이 살펴봐야죠.
ⓒ 김혜경
아주머니들은 모판에 흙을 뿌리고 나르고 아저씨들은 논에 들어가 모판을 앉힐 자리 바닥을 고르게 펴고 계십니다. 푹푹 빠지는 논을 고무장화 신고 걸어 다니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모판을 들고 나르며 아주머니 한분이 "아이고 되다! 밥 한 그릇 만들기 요렇게 되네" 하시자, 다른 어르신 한분은 "내년엔 난 빠져. 불러도 안올겨"하십니다. 얼굴에 웃음가득 띠며 하시는 말씀들이, 오늘 오신 마을 분들 모두 힘들다, 힘들다 하시면서, 이제 불러도 안온다고 하시면서 한평생 함께 품앗이하며 나락농사를 지으셨겠지요.

▲ 모판 앉을 자리를 판판하게 합니다. 뿌리 잘 내리게 반도롬하게 골라줘야겠죠?
ⓒ 김혜경
모판을 앉히고 간이 하우스를 만들 대꼬챙이를 모판에 가지런히 놓습니다. 맛있는 찰밥으로 참도 먹고, 다시 일손을 바삐 놀리십니다. 두 분씩 짝을 이뤄 논에 줄을 치고 반듯이 하우스 대를 둥글게 꽂으시고 이번엔 비닐을 잡은 분이 논을 가로지릅니다. "자 당겨요!" "아, 중간에 잡아야지! 자, 들고, 내려!" 이것도 여럿이 짝이 되어 한분은 비닐 감긴 막대를 잡고 한분은 주르륵 펴는 일을 하고 중간에 사이사이 비닐을 사뿐히 들었다 반듯하게 내려놓습니다.

못자리를 내며 드는 생각이 무슨 운동회 같습니다. 볍씨 뿌리기, 나르기, 대꼬챙이 박기, 비닐치기 등 고되고 함께 해야 하는 못자리운동회(!) 종목들이 이어집니다.

▲ 영차,영차, 모판 나르기를 하다보면 마을 단합대회가 따로 없죠
ⓒ 김혜경
시골일은 참 혼자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뭐든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해 있던 도시내기들은 그다지 사람 귀한 줄을 모릅니다. 촌에서는 이웃사촌이 평생의 동반자일 수밖에 없는데요.

사실 조장을 자처하신 할아버지가 이말 저말 하시는 거야 웃자고 하시는 것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 알아서 착착 일을 찾아하시는 모습들에서 손발이 맞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마을 못자리 운동회의 또다른 종목은 2인1조 하우스 대 세우기.
ⓒ 김혜경
작은 하우스에 비닐을 두르고 흙을 가장자리에 얹어 갈무리를 하십니다. 지금은 비닐 없으면 농사 못 지을 것 같은데 박정희 대통령때 비닐 치라고 지시 내려와 애먹었었다며 옛이야기도 하시고, 예전엔 못자리 하려면 뽕잎 따서 곱게 갈아서 거름하고, 여름에 칡 잎 새로 나올 때 거름할 것 베러 다니기도 했다는 거름 만들던 이야기도 하십니다.

▲ 다된 하우스대 위에 비닐치기. "자, 들었다 놔. 영차!"
ⓒ 김혜경
화학비료에 비닐에 이런 것 없이도 농사짓던 시절이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데, 다시 '유기농법'이라며 새로운 기술인양 이야기하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지금 이런 구부정한 노인들만 있는 시골에서 모두 손으로 풀 뽑고 풀 베다 거름하라면 누가 하실 수 있을까요. 사람 손 덜 가는 농약에 화학비료에 비닐로 그나마 농촌의 들녘을 지키고 계신 어르신들에게 유기농업하자는 이야기가 물정 모르는 이야기로 비치겠지요. 이런 기억들 간직하신 농사박사 어르신들 떠나시기 전에 젊은이들이 왕창 시골로들 오셔서 손 많이 가는 옛 농법 익히고 번쩍번쩍 기운 좋게 들녘을 지켜나가면 좋을 텐데요.

봄 햇살치고는 따가운 햇살 아래 점심밥 나오기 전 못자리 하우스가 예쁘게 줄지어 만들어졌습니다. 제일 재게 일하시던 주인아주머니는 어느새 안 보이신다 싶더니 밥을 이고 나오십니다. 한상 걸게 차려내시는데 이건 원더우먼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이런 상 차려내려면 종일 준비해야 나올 텐데 일하다말고 달려가 끓이고 무쳐 내오십니다.

뜨끈한 두부조림에 동태찌개에 맛있는 햇김치에 일은 눈곱만큼 돕고 밥은 고봉으로 먹습니다. 꿀맛입니다. 버스가 한 대 서자 장에 다녀오시던 동네 분들이 내리십니다. 지나는 사람마다 너나할 것 없이 손짓해 불러 밥 먹고 가라 부르시는 손길이 참 넉넉합니다.

▲ [뒤에 선 아주머니 연출사진]"조장님, 사진도 찍는데 뭔가 지시하는 손도 좀 뻗고 지시하는체 해봐요."
ⓒ 김혜경
요즘 촌에는 묵정논이 늘어갑니다. 어떻게 된 것이 농사 안 지으면 오히려 휴경보상금을 주고, 기계 안 들어가는 산비탈 다랑이 논들은 자꾸만 묵정논이 됩니다. 다랑이 논까지 올라가서 사람 손으로 농사짓기엔 남아있는 농부들 연세가 많으셔서 너무 힘에 부칩니다. 다른 할아버지께 못자리 하셨냐고 물으니, 논농사 안 지으신다 하십니다. 논농사 이거 해봐야 옥수수 숭구는(심는) 것보다 못하다며 뭐 하러 짓느냐고 하십니다. 휴경보상금으로 잡풀이 우거진 논들, 그러면서도 논에 땅값은 평당 5만원까지 가서 정작 농사지으려는 젊은 귀농자들에겐 너무 턱없이 비싸기만 한 현실이 스치며 잠시 착잡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 하우스 마무리 완료!
ⓒ 김혜경
모내기 사진은 많이 봤어도 못자리 하는 사진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못자리야말로 한해 농사에서 제일 중요한 시작인데요. 쌀 한 톨에 손이 백번 간다는 말은 들었어도 미처 몰랐습니다. 못자리만 해도 손이 서른 번도 더 가겠네요.

오늘 일하신 어른들 모두 농사 지어 자식들 다 나눠주신다 합니다. 도시에서 앉아서 쌀 받아먹는 우리 아들딸들이 밥 한 톨 남기면 안 되겠어요. 오늘 못자리 운동회(!)에 주전선수는 아니지만 참석해보니 여간 고된 게 아니네요. 우리 들녘을 지키고 계신 아버지 어머님들, 죄송스럽고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덧붙이는 글 | 도시에서 앉아 택배아저씨가 전해주는 쌀 받아먹는 아드님 따님, 이렇게 농사져서 보내주시는 쌀잉께 우리 밥 한톨 허투루 남기지 맙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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