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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 나이도 이제 서른넷이오. 더구나 그년이 도망간 이후의 삶은 두려움마저도 잊게 하는 모양이오. 멸시와 조소를 받고 살다보면 그러지 않겠소?”

조국명이 본 나충일은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무슨 이유인지 친구들과 패거리를 지으며 돈을 쓰고 다니기는 했어도 한때의 젊은 치기로 보아줄만 했다. 그래서 동생을 서둘러 맺어 준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인생을 더 나쁘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용히 돌아가거라. 그가 이 장원을 벗어나거든 병신을 만들던지, 죽이던지 네 마음대로 하거라.”

그 말에 나충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놈은 받아주고 나는 이대로 돌아가란 말이오? 흐흐… 형님. 분명히 알고 계시오. 그년의 남편은 아직까지 그놈이 아니고 나요. 왜 이제 칠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그 놈이 매제 같아 감싸고도는 거요?”

“말조심해라. 나는 이곳의 가정(家丁:일꾼, 하인)이고 내 손님을 받을 자격이 없다.”

조국명은 최대한 참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점차 표정이 없이 변해가고 눈빛은 차가와지고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진짜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놈을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다면 지금부터 이곳을 샅샅이 뒤지는 수밖에 없소.”

나충일 역시 이미 앞뒤 재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이곳에 오는 동안 순순히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데리고 온 인물들 때문이라도 어쩔 수 없이 황원외를 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조국명은 혀끝을 찼다.

“어리석은 놈. 그렇게 못난 놈이니 반항도 않는 아내를 개 패듯 팼겠지. 아마 그 놈이 네놈의 다리를 분지르지 않았다면 내가 네놈의 두 다리를 분질렀을 게다. 가거라. 이놈!”

조국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긴말을 해보았자 자신에게 이득 될 것은 없었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군. 결국 그 동안 그 연놈들과 내통하고 있었겠지. 가라면 가지. 하지만 당신도 무사하지는 못할 걸.”

나충일 역시 이제는 막말이었다. 그는 일어서면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황원외란 작자가 이곳 장주의 손님인가요? 서로 불필요한 오해를 막자는 의미에서 물어본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발음도 똑똑해서 매우 듣기 좋았다. 더구나 살짝 눈웃음을 짓고 있어 매우 매혹적이기도 했다.

“그대는 누군가?”

“소첩은 산서 나가에 몸담고 있는 선화(嬋花)입니다. 이 사람과 같이 천병정에서 조영반과 같은 일을 하죠.”

그녀가 굳이 자신을 총관이라 하지 않고 영반이라 부른 것은 조국명이 한 때 몸담고 있었던 금의위의 직책을 들추어내는 것과 동시에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조국명은 남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산서 나가에 한쌍의 용봉지재(龍鳳之才)가 있어 나가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옆의 남자는 그녀의 남편인 중의(仲儀)일 것이다.

“황원외는 장주의 손님이다.”

“조영반께서는 허튼 말을 하시지 않는 분으로 알려져 있으니 틀림은 없겠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조영반과 전혀 무관하다고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선화라는 여인의 혀끝은 매끄러웠다. 너무나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듣는 이로 하여금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겐가?”

“우리도 황원외를 찾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게 해 달라는 말이지요. 어차피 조영반께서 직접 그를 잡아 주실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작정 밖에서 나오기만 기다리라는 것도 너무 박정하신 것 아닌가요? 아직까지 나대공자는 누이의 남편이 틀림없지 않은가요?”

조국명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상적인 관계였다면 분명 자신을 찾아 온 나충일을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다. 허나 선화의 말은 너무나 교묘해서 특별히 거절할 명분을 주지 않았다.

“이곳은 그대들이 휘젓고 다닐 곳은 아니다. 지금 와 계시는 손님들을 모시기도 어려운 지경이니 나중에 한번 다시 들러주는 것이 어떻겠나?”

“때를 놓치면 일을 성사시키기 어렵죠. 그런 사실은 조영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하지만 조영반의 분부를 듣지 않을 수 없군요. 만약 다음에 왔을 때 황원외를 내 주신다고 약조를 해주시면 우리는 지금 조용하게 물러날 수 있어요.”

조국명의 차가와진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다. 참으로 기이한 것이 다른 사람들은 미소를 띠우면 부드러운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조국명이 웃으면 오히려 섬뜩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 때였다. 문을 열고 두칠이 들어섰다.

“형님은 손님을 받을 자격이 있소. 죽을 자리인지 모르고 설쳐대는 사람을 막을 필요가 있겠소?”

두칠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나충일을 바라보았다. 나충일은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에 대해 매우 놀란 것 같았다.

“너는….”

“오랜만이야. 확실히 이제는 큰소리칠 정도는 되어 보이는군.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형님에게 막말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사람이 간혹 있어.”

나충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칠은 친구 중에서 눈에 띠지 않고 항상 뒤에 있었던 친구였지만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화를 내면 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말똥 냄새나는 것은 여전하군. 네놈은 이 일과 전혀 상관없어.”

그 순간 나충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칠의 왼손은 어느새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 동작은 너무 빨라 옆에 있던 중의와 선화는 물론 뒤에 있던 표조귀살과 관외이흉도 손쓸 사이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그따위 말을 지껄인다면 네놈 혀가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나 볼 수 있게 해주지. 물론 다시는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네놈의 코 역시 뭉개버리고 말이야.”

속삭이듯이 나직한 그 목소리는 듣는 나충일에게는 소름끼치도록 섬뜩했다. 두칠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바로 말똥 운운하는 말이었다. 그의 부친은 역승(驛丞)이었고, 어릴 적부터 그의 몸에서는 말똥 내가 풍겼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산한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함부로 손을 쓰면 되나.”

동시에 표조귀살의 손이 빠르게 두칠의 왼쪽 완맥을 잡아 갔다. 그의 손등은 햇빛에 그을린 듯 구릿빛이었으나 그의 손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색이었다. 그의 한 수는 마치 나충일의 멱살을 잡은 손을 떼어놓는 듯한 것이었으나 실상은 두칠이 허점을 보이고 있는 그의 왼쪽 갈빗대를 팔꿈치로 가격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공격도 하기 전에 멈춰야했다. 두칠이 나충일의 멱살을 잡은 채로 살짝 끌어당기자 허점은 없어지고 완맥을 잡아가던 손이 나충일의 얼굴을 가격하게 되는 형상에 이르렀던 것이다.

두칠은 황급히 손을 거두는 표조귀살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팽개치듯 나충일의 멱살을 풀고는 말했다.

“머물더라도 이곳에선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자칫하면 귀신도 모르게 죽는다. 이것은 그래도 어린 시절을 같이 어울렸던 감정의 찌꺼기 때문에 말해주는 거야.”

두칠이 말하는 것을 보며 조국명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중이와 선화는 내심 조용하게 웃고 있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그들은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우연이란 필연의 돌연변이다.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는 우연이란 기회조차 다가오지 않는다.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할 때 우연이란 이름으로 기회가 다가오는 것이다. 노력하지도 않는 자는 남이 목적을 이룰 때 우연이었다고 말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하는 것이다.

(제 4 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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