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 송파구 ㄱ초등학교는 3년전부터 급식당번제를 폐지하고 고학년 봉사활동으로 대체했다. 5학년 학생이 2학년 아이의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서울 송파구 ㄱ초등학교는 3년전부터 급식당번제를 폐지하고 고학년 봉사활동으로 대체했다. 5학년 학생이 2학년 아이의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 박상규

[장애인 엄마 이씨] "학교는 내 처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영선(34. 가명)씨는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가 있다. 목발 같은 보조기를 사용해야 걸어다닐 수 있다. 비록 몸은 불편해도 직장생활까지 해가며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미영(가명)을 무리없이 잘 키웠다. 미영이도 엄마와 다른 사람들과의 다른 점을 인정하며 엄마의 장애를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이씨와 미영이가 한 달에 한 번 '전쟁'을 치르게 된 건 급식당번표 때문이다. 학교는 장애가 있는 이씨의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미영이를 통해 급식당번표를 보냈다. 이씨는 불편한 몸 때문에 아이들에게 급식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이씨는 결국 매달 미영이의 외할머니와 이모 등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대신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미영이는 "다른 엄마들은 모두 학교에 나오는데 왜 엄마만 다른 사람을 보내느냐"며 투정을 부렸다. 평소 엄마의 처지를 잘 이해해온 딸이 급식당번에 대해서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영선씨는 "학교가 다양한 학부모들의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당번표를 보낸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학교의 일방적 통보 때문에 마치 내가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죄인이 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난 1년 동안 매달 치뤄야 했던 이씨와 미영이의 전쟁은 현재 '휴전'에 들어갔다. 학교가 2학년 자율배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 또 급식당번표가 나올지 불안하다"고 이씨는 말했다.

[전업주부 박씨] "알아서 하라는 말이 더 무섭다"

박은혜(37. 가명)씨의 초등학교 1학년 딸이 다니는 학교는 결국 철저한 '자율급식'을 결정했다. 일방적으로 급식당번표를 집으로 보내지 않을테니 학부모들이 자율적으로 정하라는 말이었다. 박씨는 "학교의 결정은 자신들의 책임을 학부모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며 "알아서 하라는 말이 더 무섭고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결국 현재는 학급 임원 어머니 10여 명이 급식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원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결국 임원 어머니들이 다른 학부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급식당번을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고, 끝내는 학부모들끼리 어색해지고 서로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나는 전업주부라는 이유로 '집에서 놀면 뭐하냐, 학교에 나와서 일하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전업주부는 노동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줄 안다. 학부모의 노동을 왜 학교에서 마음대로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전업주부와 취업주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질 정도다."

박씨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급식당번제 폐지를 결정했으면 그에 따르는 대안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며 "학부모들을 언제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잉여 노동력으로 생각하는 심각한 발상을 버려달라"고 주문했다.

ㄱ초등학교는 부모들의 도움없이도 아이들끼리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5학년 아이들이 2학년의 급식을 자원봉사하고 있다. 5학년들은 식사가 끝난후 정리까지 무리없이 잘 진행했다.
ㄱ초등학교는 부모들의 도움없이도 아이들끼리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5학년 아이들이 2학년의 급식을 자원봉사하고 있다. 5학년들은 식사가 끝난후 정리까지 무리없이 잘 진행했다. ⓒ 박상규
[직장에 다니는 정씨] "회사로부터 두 번 권고사직을 받았다"

"급식당번 때문에 권고사직을 권유 받았을 땐 억울하고 서글펐다. 회사는 매달 2번씩 월차를 쓰는 건 곤란하다고 했다. 가정 있는 여성이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현실 아닌가. 게다가 우리 아이는 발달장애가 있어서 집에 누군가는 꼭 있어야 한다. 현재 애 아버지가 살림을 하고 내가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급식당번 때문에 두 번이나 권고사직을 권유 받았던 정은수(32. 가명)씨의 사연이다. 정씨의 초등학교 2학년 딸 미란(가명)은 발달장애를 겪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가사노동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있다.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상태에서 받은 사직 요구는 처참했다.

처음엔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급식당번을 나갔다. 그런데 전교에서 아버지가 나온 경우는 미란이네가 유일했고 부담스런 시선이 몰리게 됐다. 아버지는 급식당번 일을 잘 소화했지만 학교 분위기는 '여성 엄마' 중심이었다. 결국 급식당번은 엄마인 정씨 책임으로 돌아갔다.

정씨는 "지금은 사회적 논란 때문에 급식당번이 없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며 "새롭게 나오는 대안은 다양한 가정의 형태를 존중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급식당번제는 지금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교육청은 일선 학교에 폐지 공문을 내렸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조주은 '어머니 급식당번 폐지를 위한 모임' 대표는 "우리나라 교육계에서는 학부모가 있는 게 아니라 '학모'만 있다"며 "모성을 본능으로만 바라보는 사회에서는 어머니의 모든 일을 노동으로 보지 않고 마땅히 견뎌내야 할 희생으로만 여긴다"고 꼬집었다.

조 대표는 "급식도 하나의 교육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며 "학교 급식당번제는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노동은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차별적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고 강조했다.

조 대표는 "학교 급식 문제는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모여 고민해서 풀어야 하지만 현재로써는 교육예산 200억 확보를 통한 유급인력 투입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시 교육청은 이런 주장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