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의 꽃 터널 속으로
며칠째 계속되는 황사현상은 안개 속에 봄을 슬그머니 감췄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붓고 컬컬하여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난다.
쉬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이 슬금슬금 우리 곁에 다가오더니 심술과 변덕을 부렸던 날씨 위에 얼룩무늬 꽃 그림을 그려놓는다. 벌써 남녘의 꽃소식은 절정을 이루고, 구름을 타고 날아간 꽃의 행진이 전국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새벽 6시 30분 제주시 노형동 한라수목원. 선잠을 깨고 달려 온 사람들 틈으로 봄꽃들이 부시시시 아침잠에서 깨어난다. 황매화, 홍매화, 명자 꽃, 진달래, 개나리, 철쭉, 제비꽃, 백목련, 홍목련, 그리고 하늘을 뒤덮고 있는 벚꽃.
아침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누는 벚꽃이 이곳의 여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디 피는 벚꽃은 원망했던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만 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을 성급하게 굴었던 사람들의 성미는 초고속 정보화 시대에 살면서 ‘빠르게’만 외쳤던 착오가 아닌지.
기지개를 켜는 꽃잎들 사이로
오늘은 유난히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으니 아침 산책길의 발걸음도 가볍다. 산책로에 접어드니 앞서가던 젊은이가 벚꽃의 터널을 뚫고 달리기 시작한다. 느슨하게 산책을 하려고 맘먹었는데, 달리는 젊은이를 보니 나도 덩달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화목원에 들어서니 외국인 부부가 부지런함을 자랑하며 홍매화 꽃잎에 코끝을 댄다. 무슨 향기가 날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들의 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만 보았다.
형형색색의 파티 복으로 갈아입고
한라수목원 화목원은 꽃잎들의 기지개를 켜는 소리와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로 분주하기만 하다. 이제 막 얼굴을 비비고 깨어난 황매화의 꽃잎이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동료들을 깨우기 시작한다. 정교한 꽃잎은 마치 조화 같았다. 황매화는 버드나무가지처럼 가녀린 가지위에 봄의 색깔을 연출한다. 검지손가락을 들고 꽃잎을 만져보았다.
“음… 예쁘기도 하지!”
황매화도 내 말을 알아들은 듯 바람에 고개를 흔들어댄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가지 끝에 피어있는 홍매화는 화목원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이른 아침 벌써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황매화는 오늘 나들이를 가려나 보다. 그리고 그 옆에 숨어있던 명자 꽃도 아침 산책 나온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든다.
수목원의 언덕 위에 진달래가 만개했다. 활짝 핀 진달래를 보니 어릴 적 뛰놀던 고향집 뒷동산이 생각났다. 봄이면 연분홍으로 꽃동산을 이뤘던 언덕배기는 우리들의 유일한 아지트였으니 말이다.
바람결에 춤추는 ‘봄의 왈츠’
잰걸음걸이로 산책로를 돌다보니 어느새 등엔 후줄근하게 땀이 흐른다. 아침 산책은 느껴본 사람만이 그 진미를 아는 최고의 프리미엄. 새벽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달려보는 맛도 최고의 혜택이다.
형형색색으로 피어나 아침을 여는 봄꽃들은 달리는 발자국에 화음을 띄운다. 그리고 꽃들의 왈츠가 시작되었다. 화목원을 지나 산책로를 돌아 정상까지는 20여분 정도, 분주해야 할 아침 시간을 쪼개서 봄을 만끽하니 어느새 갈증이 생긴다.
벚꽃이 만개한 한라수목원 사무실 옆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빼어들고 목을 축이니 동천에 해가 밝아온다. 심호흡을 하며 아침을 열었던 산책길. 마치 파티 복을 차려 입은 듯, 바람결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봄꽃들의 왈츠는 산책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꽃잎이 진자리엔 다시 꽃이 피어나고
겨울과 봄의 교차로에서 붉은 빛을 토해냈던 동백나무 아래에는 또 다시 꽃이 피어난다. 꽃잎이 시들기도 전에 꽃이 진다는 동백꽃, 꿈틀거리는 대지 위를 핏빛으로 물들인 동백꽃은 떨어진 꽃잎이 꽃밭을 이뤘다. 마치 동맥의 선혈처럼 검붉은 혈기를 상기하듯.
겨우내 얼었던 수목원의 인공호수는 봄바람에 사르르 녹아버리고 그 위에 떨어진 벚꽃 꽃잎들. 기지개를 켜며 피어나는 벚꽃 아래 떨어진 꽃잎은 호수 위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인생의 긴 여정에도 휴식이 필요하듯이 지난 겨울 추위와 고통을 참고 피어난 봄꽃들은 호수 위에 휴식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