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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탐스런 녹용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탐스런 녹용 ⓒ 성락
말끔해진 축사를 보며 모처럼 땀흘려 일하고 난 성취감도 제대로 맛보았습니다. 팔 다리가 묵직해진 느낌이지만 찬 개울물에 씻고 나니 금세 시원해집니다.

맛있는 점심식사였습니다. 수북한 밥 한 공기를 다 비웠습니다. 반 공기 정도 더 먹었으면 하는 식욕을 억제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 상쾌한 기분이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막 끝내는데 새로 포장된 시멘트 길을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길 포장공사를 마무리하고 있어 농장까지는 차가 올라오지 못합니다. 맑은 공기를 쐬며 걸으니 참 좋다고 말합니다.

이 분들은 사슴 방목장 일부와 지금 살고 있는 집터의 땅 소유주들입니다. 이 분들이 이 땅을 소유하게 된 건, 20년 전 일입니다. 이 분들로부터 땅을 다시 되사려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이익을 반씩 나누기로 하고 소를 사준 투자자들

80년대 초, 아버지는 1만여 평에 달하는 농사 외에 한우를 사육하셨습니다. 사방이 온통 산이어서 소먹이는 얼마든지 자급할 수 있는 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분들과 친분이 있는 사촌형님을 통해 소 몇 마리씩을 위탁받아 수익을 나누기로 했던 것입니다.

기억으로는 약 10여 마리가 아버지께 맡겨졌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은 자본이 부족한 농촌 실정에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먹이 자원과 노동력을 가진 농민에게 도시자본이 투자되어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 외에도 여러 측면에서 진보적인 현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땅이 된 사슴 방목장 일부
남의 땅이 된 사슴 방목장 일부 ⓒ 성락
아버지는 열심히 소를 돌보았습니다. 고등학생이던 저도 틈나는 대로 소 먹이는 일을 도왔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인 이른 새벽, 쇠똥이 가득 묻은 고삐를 양손에 잡고 멀리 산 속까지 소를 끌어다 매 놓는 일은 어린 나이에 정말 싫었습니다. 그러나 소는 우리 식구들의 희망이었기에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습니다. 투기성 짙은 고랭지 채소 농사로 번번이 손해만 입으신 아버지는 소 사육에 모든 것을 거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격 폭락으로 무너져버린 온 식구의 희망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 유명한 소 파동이 닥쳐온 것입니다. 불과 한두 달 사이 소 값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송아지를 팔아 사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거저 준다고 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고통이 계속됐습니다.

소들은 말라갔습니다. 사료 한 톨 얻어먹지 못하는 소에게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버리다시피 나오는 왕겨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허기진 소들은 왕겨로 배를 채웠으나, 그 결과는 너무도 참담하게 나타났습니다. 소화되지 않는 왕겨가 위벽에 달라붙어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악몽 같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살아남은 소 숫자가 절반도 안 됩니다. 그나마도 피골이 상접한 몰골들이어서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부는 물론, 농협이나 축협은 왜 그럴 때 힘이 돼주지 못한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질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헐값에 소들을 정리했습니다. 아버지께 들은 바로는 마리당 130만 원인가에 구입한 소를 1년만에 30만 원도 채 안 되는 값으로 소장수들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그때 낙심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살붙이 같은 땅을 쪼개 투자자들에게 보상하다

소를 처분하고 나니, 투자한 분들이 문제였습니다. 큰 이익을 바랐다기보다 그분들 나름대로 농촌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나누면서, 고향처럼 왕래할 수 있는 연고를 만들고자 시작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소 파동을 불러 온 실정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는 평생 장만하신 살붙이 같은 땅들을 쪼개었습니다. 그리고 투자자들에게 한 뙈기씩 분배했습니다. 투자액에 비해 충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농촌을 사랑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것이라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의 피땀이 스며 있는 텃밭
아버지의 피땀이 스며 있는 텃밭 ⓒ 성락
약 7천여 평의 밭이 그렇게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 분들은 이후에도 1년에 한 번 정도씩 이곳을 찾았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와서 산나물도 뜯고, 또 부모님이 농사지은 고추 등을 사가기도 하면서 소 값 파동의 후유증은 점차 잊혀져 갔습니다.

그렇게 20여년이 흐른 지난해, 그분들이 땅을 팔겠다고 합니다. 사슴농장의 일부로, 또 집터를 비롯한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는 제가 맡았으면 한다는 희망을 전해왔습니다. 그럴 경우 시가보다는 저렴하게 땅을 넘길 수도 있다는 뜻을 비추었습니다.

급할 것 없는 땅 주인, 또 높아진 가격을 요구

그런데, 문제는 그 '시가'였습니다. 산골짜기마다 외지인들의 투기열풍이 불고 있는 요즘 이곳 또한 땅값이 꽤 올랐을 것이라는 판단을 그분들은 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고, 또 당장 땅을 되찾을 만한 형편도 안 되는 저와는 많은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몇 차례의 전화통화로 어느 정도 가격 절충이 된 듯하여 그분들이 이곳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농협을 통한 농지구입 자금을 활용해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복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아버지의 피땀이 배어 있는 땅을 다시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소 파동에 넘어간 지금 살고 있는 집터
소 파동에 넘어간 지금 살고 있는 집터 ⓒ 성락
차 한 잔을 나누며 그분들은 아버지와 옛일을 이야기합니다. 모두에게 금전적 손해와 아쉬움을 주었던 일이지만 이제는 웃으며 회상할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정작 땅 문제에 대해 정색을 하고 주고받는 대화에서 저는 좌절을 하고야 맙니다. 전화상으로 접근했던 조건보다도 절반 가까이나 또 높아진 가격을 제시합니다.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자는 애매모호한 결론만을 남긴 채 그분들은 서둘러 떠났습니다. 저 또한 당장은 타협점을 찾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약주를 몇 잔 곁들이신 아버지도 실망의 낯빛을 숨기지 못하십니다.

오늘 아침, 축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어제의 무리한 노동이 한꺼번에 피로로 몰려오는 듯합니다. 오기라도 동원해야 하겠습니다. 좀 늦더라도 오늘은 축사 통로로 밀려나온 보기 흉한 거름을 말끔히 치워야 하겠습니다. 땅 문제는 잠시 접어야지요. 언젠가는 제 힘으로 그 땅을 찾을 날이 올 거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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