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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13집 四春期
이선희 13집 四春期 ⓒ Emi
어느 분야에서든 최정상의 위치에 서 있다가 내려온 사람들의 심리는 어떨까? 긴장과 초조의 강박일까? 관조와 허무의 냉소일까? 정상에 서보지 못한 대중들의 평범한 호기심에 조용히 노래로 답을 주는 앨범, 이선희의 13집 <사춘기>.

영웅 조용필과 대중음악사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이선희. 그 시대 혹자들에겐 그가 종교였고, 사랑이었고, 마법이었던, 정상에서의 10년 가까운 시간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세월의 흐름은 대중의 관심을 침식해 가고 결국 7집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을 기점으로 철옹성 같던 그녀의 제국은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제국과 신도가 사라진 교주는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지듯이 그의 노래와 모습도 발라드 가수의 가요무대 격인 <열린 음악회>의 단골가수라는 흔적만을 남긴 채 힙합과 랩, 그리고 댄스와 R&B가 새로운 제국의 주인이 된 여기 이 시대에서 잊혀져 갔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다. 대중들 뒤에서 보이지 않아 더욱 숭고한 땀방울로. 싱어송 라이터라는 숨겨진 자질을 아무도 몰래 담금질하며 자신의 음악을 치밀하게 정화시킨 그가 이제는 제 음악의 날줄과 씨줄을 스스로 엮을 줄 아는 진정한 장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전곡을 작사, 작곡, 프로듀싱한 <13집 사춘기>를 들고 당당하고 기품있게 그러나 따뜻하고 겸손하게 다시 돌아왔다.

그의 13집 <사춘기>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흔해서 닮아 버린 댄스와 어설프게 설익은 R&B발라드로 더욱 더 헤질 여지조차 없도록 값싸고 천박해져 버린 이 시대의 안스러운 사랑이라는 골동품에, 찬란하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깊이 있는 내면의 울림으로 보듬고 다듬어서 숭고하고 아름다운 찬가를 선사하고 있다.

한번 거장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1번 트랙 <인연>에서부터 거장의 여유가 느껴지는 마지막 9번 트랙 피아노 소곡 <피아노>까지 들어보라. 그러면 손으로 빚고 또 빚어서 빛마저도 투영시키는 명품 도자기처럼, 스스로의 화로에 한 올 한 올 자신을 불태우며 치밀하고 정교하게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을 다 해 뽑아 놓은 선율을 우리는 소름 돋는 행복감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도록 팽팽하게 당겨진 거문고 현을 연상시키는 이 앨범의 오프닝 <인연>은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긴장미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교향악의 장엄함과 웅장함을 빼어닮은 <장미>는 사랑이라는 대지 위에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대서사시가 된다. 이는 자연인 이선희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성이 아름답게 아롱아롱 맺혀 있는 <알고 싶어요 II>를 한결 더 돋보이게 하는, 교묘하지만 정교한 어울림으로 상승한다.

스스로의 색깔과 스스로의 이야기를 멋지게 풀어 낼 줄 알게 되었음을 자축하는 의미일까? "지금 이만큼 힘든 만큼, 꼭 그만큼 날 아껴줄 그 사람 이제 찾아 왔으면"하고 자신의 바람을 비감 어린 선율이지만 소박하게 소망하는 수작 <사과 나무 아래서>를 지나면 이 앨범 화룡점정격인 5번 트랙 <왜?>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모던 록을 추구하는 신선한 인디밴드 같은 새로움이었다. 불혹을 넘긴 나이를 고려하면, 노래를 듣고 나서는 자연스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곳에 사랑이란 있는지, 어디고 널려진 그 사랑한단 말 속에 존재하기나 한지"라고, 이 시대의 사랑에 대하여 보다 젊어진 목소리로 물어보는 거장의 애절한 호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의 첨단이라는 모던 록의 형식을 빌려와서 더욱 가슴을 치는 비장함으로 깊은 임팩트의 여운을 남기고 잦아든다.

자문했던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 풀어 놓는 해답처럼, 6번 트랙 <사춘기>와 7번 트랙 <자전거>는 담백하고 간결하게, 하지만 직접적으로 사랑의 중심부에 멜로디를 관통시킨다. 이는 내면적 성찰을 음악에 실을 줄 아는 거장의 면모에 대한 투명한 반영이다. 어느새 그는 느릿하지만 편안한 멜로디 <사랑이 깊어지고 있습니다>라고 노래하며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봄이 오는 길목 한 켠에서 앨범 표지의 흐드러진 꽃잎처럼 사랑하라고 보다 정직해지고 풍요로워진 울림으로 속삭인다.

그런데 도대체 거장은 세월 속에서 얼마나 더 여유로워진 것일까? 많지도 않은 아홉 곡으로 채워진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은 예상치 못했던 피아노 솔로곡 <피아노>다. 거장의 또 다른 단아한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그 기대와는 다르게, 아니 그 기대의 크기보다 더 큰 기쁨으로 이선희 작곡, 최태완 편곡의 <피아노>는 더 다양한 형식과 다양한 시각으로 가슴 저 밑바닥까지 두드리는 충만한 떨림이 되어 앨범 마디 마디에 쉬지 않고 보석을 뿌리며 대미를 장식한다.

이제 이 시대에 이선희라는 거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그의 음악을 잠시라도 즐기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은혜에 가깝다. 그런 믿음을 충분히 갖게 하는 이번 앨범 <사춘기>는 2005년 한 해 동안 출시될 많은 음반들 중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혹여 말초신경의 자극에만 익숙해져 버린 미천한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서 <사춘기>가 저주받은 걸작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에서 상처투성이로 남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은 슬며시 든다. 하지만 10대 위주로 재편되어 있는 대형 음반 매장에서 출시된 지 며칠 만에 상위권으로 랭크되어 있는 <사춘기>를 만나게 될 때마다 우리 대중음악 저변에 대한 희망 섞인 기대를 갖게 된다. 심지어 아무도 모르게 여전히 그를 지켜주고 잇는 그의 신도들에 대한 고마움까지 들게 된다.

".....난 이해하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을, 마치 딴 세상에 유배된 듯 섞이지 못한 채 풀리지 않는 슬픔을 안고서 자네....."라고 얘기하는 그의 노래 <왜?>에 나오는 이 비통한 표현이 <사춘기>의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을 알아가는 10대에게도, 사랑을 즐기고 있는 20대에게도 그리고 사랑을 다져가는 30대와, 또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40대에게도 어느 따뜻한 봄날, 혹은 봄비 추적거리는 길 한모퉁이에서 사랑노래를 들으라고, 그래서 더욱더 사랑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사족을 붙인다고 해도 이 명반에 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테이프 출시를 하지 않고 CD로만 출시된 점은 지극히 유감이고, 필자 또한 어느새 시각적 효과에 중독되었는지, 타이틀 곡이 예쁜 뮤직비디오 하나 없이 나온 것은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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