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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표지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표지 ⓒ 현실문화연구
서점에 들러 잠깐 눈에 띈 잡지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잡지 정도에 실리는 평론이 꼭 이렇게 말이 어려워야 하는 것일까. 클리세, 오마주, 미장센, 파토스, 망탈리테… 눈이 핑핑 돌아 갈만한 외래어와 현학적 장식구들은 과연 어떤 독자를 겨냥한 것일까.

그건 그렇다 치고, 잡지의 구성도 이해하기 힘들다. 쿠바의 풍광을 배경으로 체 게바라의 순수한 열정을 이야기하다가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센스 있는 남자라면 섭렵해야 할 패션 소품들의 카탈로그가 펼쳐지는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긴 카탈로그 속의 번쩍번쩍한 시계와 말끔한 옷차림으로 어려운 책이나 영화를 이야기하면 참 멋지긴 할 것이다. 읊조리기만 해도 멋있어 보이는 외래어에 불어권이나 동구권의 영화감독, 혹은 단명한 혁명가 정도가 끼어든다면 금상첨화 아닌가.

잡지가 표방하는 '품격 있는 스타일'이라는 슬로건이 혁명과 저항을 고가 브랜드와 성공적으로 묶어주고 있음을 겨우 알았다. 그렇다. 잡지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지시하고 있었다. 의미를 표백한 기호들이 단지 소비되기만 하는 곳으로서의 '여기'를 말이다.

작년에 큰 인기를 끈 어떤 드라마에서는 술주정하는 가난한 여주인공이 부잣집 남자에게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언급했었다. 그 이후 인터넷 서점에서 <옥중수고>가 일시 품절됐다. 새로운 사실 하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헤게모니란 부잣집 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자동차 회사 사장인 남자 주인공이 맑스의 <자본>을 제일 감명 깊게 읽었단다. 새로운 사실 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맑스의 <자본>은 자동차 회사 사장의 따뜻한 감수성을 설명한다. 실제 그 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 책인지는 나중의 문제다.

분개하기 전에 드라마는 단지 가짜라고 이야기하는 당신은 아마추어이다. 그것은 스펙타클의 사회를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는 시청각 교재다. 거기서 가르쳐준 대로 먹고 입고 살아야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 왜냐고 의미를 묻는 당신도 아마추어다. '외양'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은 그럴 듯한 '외양'을 어떻게 창출해낼 수 있을까의 문제다. 어떤가보다 얼마가, 무엇인가보다 멋있는가가 오로지 문제임을 깨달아라.

대중매체가 유포하는 표상과 이미지가 떠도는 사회라는 설명으로 스펙타클을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그 표상과 이미지가 인간관계를 비롯한 모든 현실적인 것들을 매개하는 사회, 그래서 현실 속에서 표상이 출현하고, 표상들 속에서 현실이 살아가는, 그리하여 결국 모든 현실이 표상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사회, 그것이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스펙타클은 시각 중심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서구 근대의 호러비전이다. 직접적인 삶에서 사유를 출발시키지 않고, 피상적인 사유를 통해 삶을 전유하려 한 관념론은 현실을 철학화한 대신에 철학을 현실화한 것이다. 실제적인 삶을 소유로 대체하고, 교환가치를 무기로 한 자신의 피상성으로 사용가치를 대체한 스펙타클은 모든 것의 소외 위에 자신만의 발전을 계속한다. 실제적인 필요도 스펙타클의 사이비 필요로 대체한 채 오로지 발전만을 위한 발전을.

경제 지표가 회복되었다고 정부 기관에서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기가 힘들다고 얘기한다. 경제 지표가 가짜여서도 아니고, 사람들이 엄살을 피우기 때문도 아니다. 경제 지표는 스펙타클이 자신의 능력을 회복시키는 지표이지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다. 경제 위기의 극복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냐다. 스펙타클의 발전만을 위한 발전을 회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삶을 회복시킬 것인가.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우리 삶을 조작하는 스펙타클에 의해 각자의 삶은 파편화되고 주변화 되어 있다. 스펙타클은 이 삶을 분리된 채로 통합한다. 단지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은 스펙타클로부터 거짓된 삶을 질서와 긍정성으로 주입받고 있을 것이다.

공간적으로 가까이 생활한다고 혹은 외면적인 관계가 아무리 많이 이뤄져도 이것은 함께 살고 있다는 본래적 의미의 공존과 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환상'이다. 그러나 이 환상은 시각 중심주의와 관념론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극복될 수 없다.

유물론이란 서구 근대의 시각 중심주의와 관념론을 실제적인 삶을 통해 전복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실제적 조건을 직시하고, 스펙타클이 주는 보상들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의해 생산하고, 그 생산물의 주인이 되기 위한 실천을 계속하는 것, 누구에게도 우리의 결정을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과 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 스펙타클의 거짓에 대항해 진실의 편에 서는 방법으로 기 드보르가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 아래 종속시키는 신자유주의의 흐름 아래, 자본이 모든 영역에 있어 자신의 지배를 완성하는 지금, 기 드보르가 책을 쓰던 당시보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보다 강력해진 듯하다. 맑스나 그람시도 드라마의 이미지로 전락해버리는 지금, 스펙타클의 '대응전략'은 무한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기 드보르에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우리 삶의 진실을 찾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우리 스스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깃발을 들고 노동자를 외면한 당과 관료들의 예에서 보이듯이, 스스로의 욕망과 생산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결국은 그 대리자들에게 이용당할 뿐이다.

삶은 누구에게도 위임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과학이든 예술이든 삶을 재전유하려 했던 상황주의자의 기도들은 여전히 의미가 크다. 그들의 현실적인 좌절과 실패를 떠나서 근대성을 성찰하고 극복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의 현재를 성찰하고 극복한다는 뜻이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덧붙이는 글 | 예상하겠지만, 이 책은 독자 여러분이 접할 수 있을 어떤 책보다 "반스펙타클적"이다. 각오 단단히 안 된 독자들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만큼.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지음, 유재홍 옮김, 울력(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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