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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梅軒)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김덕룡)와 상하이시 훙커우[虹口] 국제교류중심이 공동 주최하는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 의거 73주년 기념식'이 의거 현장이었던 중국 상하이 매정(梅亭; 윤 의사의 호인 매헌을 따 이름을 붙였다) 앞 광장에서 4월 29일 엄숙히 개최되었다.

▲ 상하이 홍구공원 매원에서 개최된 윤봉길 의사 73주년 기념식
ⓒ 유창하
이 자리에는 주상하이 총영사관 박상기 총영사와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김달수 부회장, 3.1여성동지회 이재순 회장, 윤 의사 유족,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담당 사무관, 상하이한국학교 학생과 교사, 상하이 거주 교민 등 많은 한국인들이 참석하였고, 공동 주최자인 상하이시 훙커우에서는 인민정치협상회의 장즈언(張志恩) 부주임 등 중국측 인사가 다수 참여하였다.

양국 합계 200여명이 참가한 이날 행사는 참가자 소개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기념사에 이어 이번 행사를 위해 한국에서 상하이까지 온 3.1여성동지회 합창단이 윤 의사를 기리는 김남조 작사 나운영 작곡 '윤봉길 의사의 노래'를 불렀다.

▲ 3.1여성동지회 합창단이 기념식장에서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 유창하
이어서 행사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3.1여성동지회 합창단이 부르는 '나의 살던 고향' '우리의 소원' 등 한국 동요를 들으면서 매정 안에 마련되어 있는 윤 의사 동상에 국화꽃을 헌화하며 윤 의사의 높고 거룩한 정신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리는 참배의 시간을 가졌다.

한편 이날 행사에 참석한 박상기 상하이총영사는 기념사를 통해 "윤 의사의 의거는 상하이임시정부의 존재와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였으며,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며 "공동으로 주최하는 윤 의사 의거 기념사업은 한국과 중국의 우호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된다"고 강조했다.

▲ 윤봉길 의사 흉상 앞에서 헌화하는 상하이한국학교 어린이들
ⓒ 유창하
그리고 김달수 기념사업회 부회장 역시 기념사를 통해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에 발생한 상하이 홍구 공원 윤 의사 의거는 일제의 야욕을 응징하는 거대한 쾌거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라며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였다.

이어서 공동 주최측인 중국 상하이 훙커우의 장즈언 부주임은 "윤 의사는 한국의 민족적 영웅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인도 존경하는 항일의 영웅이었다"라고 추모하였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오래전에 조성한 '윤봉길의사기념관'에 2003년 집계로 3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가 역사교훈의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았다"라고 말하며 "항일전쟁 승리 6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항일 공동투쟁의 지나간 역사를 간직한 양국 국민 간의 교류와 친선은 증진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한중간 교류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윤봉길 의사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현장 기념비
ⓒ 유창하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에서 출생하여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하고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 활동을 하고 '농민독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부흥원을 설립하고 월진회를 창립하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농민계몽 활동을 하다가 23세에 조국 독립을 위해 직접 싸우기로 마음먹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인공우회를 조직하고 노동야학과 노동운동을 하였고 김구 선생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윤봉길 의사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는 사진이다.
ⓒ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그러다가 25세 때인 1932년 윤 의사는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 선생과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였으며 의거 2일 전에는 자필로 의거 실행의 심정을 밝히는 글을 남겼으며 두 아들에게는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는 유서를 남겼다.

유서를 남긴 2일 후 4월 29일 일본의 천황 생일을 기념하는 이른바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이 거행되던 상하이 훙커우 공원 단상에 물통형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등 단상의 7명을 응징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당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체포 후 조사과정에서 답변하기를 "한 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지 않지만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있다"라고 말하며 "현재 세계 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체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믿는다"라고 진술하였다(일본 내무성 보안과 1932년 7월 작성한 문서 "상해에서의 윤봉길 폭탄사건 전말"기록).

▲ 윤봉길 의사 총살 당한 직후 운명하는 장면
ⓒ 윤봉길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의 살아생전 행적과 민족 자주와 독립을 위한 끊임없는 숭고한 정신과 업적은 현재 일본에 의해 발생한 일본의 독도 소유권 주장 파문, 식민지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 등을 한민족이 어떻게 다루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반면 교사하는 주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여전히 주변 강대국의 정책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풍전등화의 위기는 그 형태를 달리할 뿐 아직도 한반도 주변에서 계속되고 있다.

윤봉길 의사 의거 73주기를 맞이하는 이 땅의 한민족 후손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윤 의사의 정신과 그분이 걸어온 길을 되새겨 보게 한다.

덧붙이는 글 | 유창하 기자는 다음카페 '중국상하이한인모임' 운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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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간 오마이뉴스에서 쉬었네요. 힘겨운 혼돈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새로운 기사로 독자들께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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