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조심스럽게 촛불을 켜는 정성으로 열두 자식을 길러 주신 엄마
ⓒ 한명라

오래 전부터 무남독녀이신 친정엄마의 살림 사는 집은 최소한 세 집 이상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엄마,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던 저와 동생이 살고 있는 우리 집. 시집, 장가를 안 간 오빠와 언니들이 사는 서울의 자취집, 그리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던 외갓집.

엄마는 우리 열두 남매 뒷바라지와 아버지 뒤치다꺼리, 외갓집 논밭의 농사까지 챙기느라 언제나 종종거리며 바쁘게 사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엄마가 외갓집에 가셔서 주무시거나, 서울 언니 오빠들에게 다니러 가서 며칠 동안 집에 오지 못하면, 짧게는 2일, 길게는 일주일 동안 아침 저녁 밥을 직접 지어 먹고 도시락도 제 손으로 싸가지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엄마는 남보다 몇 배나 많은 자식들을 두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외갓집 일에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는 딸이면서도 세상의 그 어떤 아들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외갓집에 자주 다니며 친정의 모든 일을 챙기셨습니다.

"데이트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시집을 가?"

제가 결혼을 해야할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주말이면 우리들이 살고있던 경기도 안양에서 6시간 이상 떨어진 외갓집까지 다녀오고는 했습니다.

당시 엄마는 "이제 너도 시집을 가야 할 텐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엄마가 외갓집에 갈 때마다 출퇴근하면서 끼니를 책임졌던 저는 은근히 부아가 나서 엄마에게 톡 쏘아붙였습니다.

"이구~ 애인이 있다 해도 데이트 할 시간이 없는데 무슨 수로 시집을 가?"

정말 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가 안계실 때마다 모든 식사를 책임져야 했고, 그 책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후 한 남자를 만나 1년여 동안 데이트할 때에는 제 그늘에 가려 그동안 편안하게 살아온 여동생이 아버지 식사를 챙기고는 했습니다.

아무튼 엄마는 막내까지 성장하여 결혼을 시키고 나서는, 주말이고 평일이고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외갓집에 자주 다녔습니다. 그냥 돈만 있으면 사 먹을 수 있는 쌀이며 깨며 고추 등을 외갓집 텃밭에 심고 가꾸면서 그 곡식들을 자식들에게 보내 주는 낙으로 사셨습니다.

말없이 배달된 어머니의 쌀자루

20년 전쯤 둘째 오빠가 직장을 그만두고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둘째 오빠는 아이는 3명이나 되었고 나름대로 여유롭게 살던 살림이었지만, 공부 기간이 예상 외로 길어지면서 올케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말은 못하고 어려워진 살림하느라 상당히 빠듯했었나 봅니다. 다른 오빠 언니들이 생활에 보태라고 봉투에 자기들의 마음을 담아 보내기는 했지만, 그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초인종이 울리기에 올케언니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더니 쌀자루 하나가 덩그러니 문 앞에 놓여 있더랍니다. 처음에는 잘못 배달되어온 쌀자루인 줄 알았는데, 자루에 쓰인 글씨를 보니 언니네 집주소가 삐뚤빼뚤 서투르게 쓰여진 것이 시어머니의 글씨더랍니다.

물론 쌀이 없어서 밥을 굶진 않았지만, 아무런 말씀 없이 보내주신 시어머니의 사랑이 하나 가득 느껴져서 올케언니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지난 2000년에도 넷째 오빠와 셋째 형부가 다니던 직장에 명예퇴직을 신청하고는 예전에 둘째 오빠가 공부하던 자격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형부네는 삼수를 하는 큰아들과 고3인 둘째로 하여, 한 집에 수험생이 3명이나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평소보다 더욱 사위와 아들, 대학 수험생인 외손자들을 위해서 매일 빼놓지 않고 간절하게 새벽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또 가을이 되어 손수 가꾸신 곡식들을 수확하여 다른 자식들은 한 자루씩 보내주는 쌀을 넷째 오빠와 셋째 형부 집에는 두 자루나 보냈더랍니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보내주신 두 개의 쌀자루에서 셋째 형부가 장모님의 깊은 사랑을 느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형부를 낳아주신 친부모님도 미처 살펴주지 못하는 사랑을 장모님께 받고, 그 고마움을 시간이 날 때마다 오래도록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고 셋째 언니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 1921년생 닭띠인 엄마는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열두 자식을 보살피며 길러 주셨습니다.
ⓒ 한명라
그 많은 자식들에게 소리 없이 보내준다는 엄마의 쌀자루를 저는 오래도록 받아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시댁에서 다 가져다 먹으니까 주지 않지만, 왠지 내 마음이 미안하구나…."
"이구~ 엄만, 괜찮아~ 엄마가 준다고 해도 내가 안받아요. 받은 거나 마찬가지지 뭐…."

그러는 동안 지난 2001년 5월이었습니다. 엄마는 드디어 당신이 그렇게 찾아다니던 외갓집(엄마 친정집)을 새 집으로 지어 경기도 안양에서 이사를 가셨습니다. 그때 엄마는 시간만 나면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또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쫓기듯 다니시던 멀고 먼 길… 그 번거로움에서 벗어났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요.

그리고 그해 12월, 친정을 찾았던 저에게 엄마는 유난히 커다란 쌀자루 하나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시댁에서 쌀을 가져다 먹기 때문에 괜찮다고 남편과 제가 아무리 말려도, 다른 자식들에게는 여러 번 쌀을 보내주었는데 너에게만 단 한 번도 쌀을 주지 못해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는 엄마의 말씀에 남편과 저는 더이상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엄마의 땀으로 거둬들인 햅쌀 한 자루를 트렁크에 실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엄마는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저에게 쌀을 주지 못했다는 무거운 마음을 벗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 후 엄마는 마음 놓고 집 주변 텃밭에, 외갓집 양지편 밭에, 집 앞 논에 농사를 지으셔서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식들에게 쌀자루를 부쳐주시는 낙으로 살고 계십니다.

오늘도 엄마는 성치 않은 아픈 다리로 친정집을 둘러싼 텃밭과 논에 씨앗을 뿌리고 풀을 뽑으며 농사를 짓겠지요? 그 채소와 곡식들 거두어 보따리 보따리 나누어 담아서 많은 자식들에게 보내 주는 생각만 해도 엄마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뿌듯하시겠지요?

관련
기사
'열두 자식'만이 내 삶의 이유였다

덧붙이는 글 | 벌써 어버이날입니다. 이 모자란 딸은 멀리 있다는 핑계로 전화 한 통으로 안부를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들려 드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