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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텃밭
어머니와 텃밭 ⓒ 성락

"망할 놈의 벌레가 호박잎을 다 파먹네. 며칠 안 봤더니 그새 다 망가뜨려 놨어."

아침저녁의 서늘함과 달리 숨이 턱 막히는 열기를 내뿜고 있는 밭에서 한나절을 보내신 어머니는, 이제 막 싹을 틔운 호박잎 걱정을 앞세우신다.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벌레는 보이지 않는데, 심한 것은 떡잎의 절반 이상이 없어져 버려 피해가 심각하다.

"점심 먹고 약을 좀 쳐봐야지. 저러다간 호박 다 죽겠는걸."
"벌레 종류가 뭔지 알아야 약을 치죠."
"보나마나 배추벌레 같은 거겠지 뭐. 싹이 좀 자랄 때까지는 약을 쳐야 돼."

호박 싹
호박 싹 ⓒ 성락
칠순을 넘기신 어머니는 집 아래 위 오륙백 평 남짓한 텃밭을 손수 가꾸신다.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밭에 심을 작목들을 선정하는 등 농사계획을 '치밀'하게 세우셨다. 힘들게 이것저것 심지 말라는 아버지와는 가벼운 다툼도 벌이셨다.

옥수수, 감자, 콩, 수수, 깨 등 곡식류와 고추, 배추, 상추, 부추, 당근, 가지, 호박, 브로콜리 등 채소류가 어머니의 농사계획에 포함된 작목들이다. 그 많은 종류를 무슨 수로 다 심고 가꾸어 수확할 것인지 농사일에 서툰 나로서는 엄두가 나질 않지만 어머니는 사뭇 여유로운 모습이다.

고추밭
고추밭 ⓒ 성락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각각의 작목에 대한 농사일정이 잘 정리 돼 있는 듯하다. 고추를 심을 곳은 밭고랑을 넓게 하여 비닐을 씌우고, 당근이 심겨질 곳은 평평하고 넓은 고랑을 만들어 놓으셨다. 호박은 밭 가장자리에 터를 잡아 넝쿨이 둑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비닐하우스에는 옮겨 심을 수수모종이 잘 자라고 있다. 부드러운 퇴비거름을 사용해 직접 싹틔우신 것이다. 상추는 벌써 고랑을 따라 앙증맞은 새싹을 틔웠고, 부추는 곧 잘라먹을 수 있는 만큼 무성해졌다. 호박도 엄지손가락만큼 싹을 틔웠으나 불청객인 벌레에 의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수수와 브로콜리 모
수수와 브로콜리 모 ⓒ 성락

잘 자란 수수 모
잘 자란 수수 모 ⓒ 성락
평생을 밭에서 살아오신 어머니가 이토록 농사에 집착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 사는 집을 가운데 놓고 밭이 묵어가는 것을 그냥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심고 가꾸지 않으면 밭들은 잡풀만이 무성해질 터. 이처럼 보기 흉한 일도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다.

또 하나는 자식들에게 두루 나누어줄 먹을거리를 손수 생산하는 보람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당신의 고단한 팔다리보다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귀한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당근을 심었습니다
당근을 심었습니다 ⓒ 성락
어머니는 꽤 넓은 면적에 당근을 심으셨다. 아토피성 피부염 때문에 매일 당근과 사과 등으로 녹즙을 만들어 먹는 맏손자 중경이를 생각하신 것이다. 시장에서 사다 먹는 당근을 어떻게 믿겠냐며 지난 가을부터 별러 오셨던 일이다.

잘 자란 부추
잘 자란 부추 ⓒ 성락
콩나물 콩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수확한 너 댓 되 분량의 콩으로 손수 콩나물을 키워 손자의 체질개선용 식단을 챙기셨던 어머니다. 찰옥수수와 감자는 식구 모두 좋아하지만 특히 작은손자 제경이가 가장 좋아하는 별식임을 잘 알고 계신다.

"아, 좀 쉬엄쉬엄 하세요. 날도 뜨거운데 병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이놈의 돌멩이는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네."

배추밭
배추밭 ⓒ 성락

어머니는 밭고랑 사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발에 걸리는 대로 돌멩이를 주워낸다. 산골 밭이라는 게 '흙 반 돌 반'임을 잘 알지만 주워내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게 농사꾼의 마음이다.

상추가 싹을 틔웠네요
상추가 싹을 틔웠네요 ⓒ 성락
이제 비라도 촉촉이 내리면 어머니의 텃밭은 각종 곡식과 채소들이 무성히 어우러질 것이다. 풀을 뽑고 흙을 북돋우며 계획된 농사를 이어나가실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주름진 얼굴 위로 송골송골 고인 땀방울을 훔치시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더할 수 없는 넉넉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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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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