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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불문학관'의 기념관과 마당 전경. 뒤쪽이 노봉산이다. 소설에서는 노적봉이라 나온다. 가운데 부분 입구의 창에는 '혼불'의 흘림체 글씨가 쓰여 있는데 멀리서도 도드라져 보인다. 마당 한가운데 허리 굽어진 나무가 지팡이를 짚고 있다.
ⓒ 박태신
한참 전부터 보고 싶었던 경상남도 함양의 상림에 가려고 전라선 열차를 탔습니다. 남원까지 열차를 이용하고 그 곳에서 시외버스를 탈 요량이었습니다.

비가 온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생긴 여유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요. 어린이날 여행을 떠나니 기분은 더욱 남달랐습니다. 오전에는 비가 오는 날씨가 아니었습니다. 비가 남부 지방부터 시작된다고 하니 저는 비를 찾아 떠나는 셈입니다.

열차 여행의 즐거움, 창 밖 보기

창 밖 풍경 바라보는 것은 열차 여행의 큰 즐거움입니다. 나무가 녹색 옷을 입었다는 말이 정말 맞습니다. 5월이 되면 온 산야가 녹색 물결입니다. 짙은 녹색의 여름색 이전에 여리고 설익는 연두-녹색의 봄색이 더 좋습니다.

순서대로 새순이 돋아나 다양한 길이의 잎이 한 가지에 가족처럼 모여 있습니다. 얼마 전 길을 멈추고 문득 위를 쳐다보고 돋아난 지 얼마 안 된, 그래서 아기를 연상케 하는 은행잎을 보고서 얼마나 신기하던지….

이제 에어컨까지 틀어주는 날씨가 되었습니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점퍼로 몸을 감쌉니다. 반소매 옷을 이날 처음 입었습니다. 열차는 금세 남쪽으로 나아갑니다. 열차는 막힘이 없어 좋습니다. 열차 여행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시락과 호두과자를 파는 '홍익회 아저씨'가 분주히 오고 갑니다. 오늘 이 분은 횡재를 하십니다. 지나갈 때마다 도시락은 다 팔리고, 호두과자는 한꺼번에 여러 상자가 팔립니다. 열차 안은 쾌적합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안온한 날씨가 열차 안까지 새어들어 옵니다. 저기 한 꼬마가 창턱에 앉아 있습니다. 저렇게 앉을 수도 있구나! 어린아이의 특권….

비를 만나고서 어느 정도 지난 후 도착한 남원역은 전에 본 것과 다른 새 역사입니다. 1년 전 들른 옛 남원역은 공교롭게도 업무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었습니다. 전라선 노선 일부가 변경되어 새로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남원역이 새로운 곳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덕분에 전라선 주행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고 합니다.

남원역에 내려 혼불문학관에 들르다

▲ 교육관의 사랑방 창. 격자무늬 창살 안으로 벽면에 기대어진 그림들이 보인다. 단체 방문객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토론을 할 만한 곳 .
ⓒ 박태신
팸플릿 들고 간신히 버스를 탑니다. 남원 시내를 관통합니다. 그런데 서울 시내처럼 차가 밀립니다. 때마침 '춘향제'가 한창이었던 것입니다. 버스 안에 노인분들이 많은 것이 다른 풍경이지요.

남원 관광 팸플릿을 봅니다. 함양 가기 전에 '혼불문학관'을 들르기로 했고, 이건 정말 행운과도 같은 결정이었습니다. 버스를 바꿔 타고 외진 곳, 남원시 서매면 서도 노봉마을을 찾아갑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늦은 오후 시간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시골 마을을 조금 오르니 여러 봄꽃을 심어놓은 산책로가 이어집니다. 꽃이름 푯말에는 벌써 내년을 기약하는 인사가 덧붙여 있습니다.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는 뒤에 대나무, 옆에 연못과 정자를 둔 물레방아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분홍 철쭉이 오밀조밀 심어져 있고,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철쭉 울타리 안으로 모여듭니다.

노봉산 노적봉이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문학관은 초입을 들어서면서부터 아주 정성껏 지은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기념관, 교육관,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아늑한 보금자리를 오릅니다. 입구에 이 지형의 알찬 특성을 적어놓은, <혼불>의 한 대목을 적어놓은 바위를 맨 먼저 만납니다. 구름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

"서북으로 비껴 기맥이 흐를 염려가 놓였으니, 마을 서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간구한다면 가히 백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을 누릴 만한 곳이다 하고 이르셨다."


<혼불> 무대를 거닐다

바로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무대인 거멍골, 매안, 청호지 바로 그 곳에 '혼불문학관'이 있습니다. 주무대인 종가집도 근처에 있습니다. 이곳 관리인에게서 고장 위치와 소설 배경을 설명 들었습니다. <혼불>의 주인공인 효원의 실제 인물이 이곳 종가에 아직도 살아 계신다 합니다. 90이 넘으셨는데도 정정하시다고 합니다.

▲ 전시관 내 안내방의 바깥 창. 이 자리에 직원 한 분이 앉아 책을 보고 계셨다. 그 안내방이 호젓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작가 최명희의 집필실을 재현해 놓은 곳이었다.
ⓒ 박태신
그러니까 작가 최명희는 자기 집의 역사를 쓴 것이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다른 성과 이름으로 나오지만, 최명희는 자기의 뿌리를 알고 싶어 자료와 증언을 모아 소설로 꾸려낸 것입니다. 그 역사가 이곳 문학관이 있는 마을의 역사입니다.

단지 역사의 스토리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은 최명희가 발굴하고 살려낸 우리말입니다. 그 우리말이 잡곡밥의 잡곡처럼 심어져 있어 소설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스토리도, 마치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만 기차역이 나오듯 그렇게 느릿느릿 전개됩니다. 한 장소에,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오래 머물면서 한을 풀어냅니다.

그 우리말 하나하나를 소화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그저 읽어나가다 가끔씩 사전을 뒤적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읽어도 소설 속의 아픈 장면 때문에 읽어나가기 어렵습니다. 주인공 각자의 삶에 비애가 숨어 있고 그것을 아주 느리고 긴 호흡으로 구구절절 풀어냈기 때문에 읽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의 맛을 얇게나마 느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부끄럽게도 한참 전에 3권까지 읽다가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교육관부터 봅니다. <혼불> 책이 가득 꽂힌 사무실과, 그 옆에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사랑방이 있습니다. 단체 관람객들이 강의를 듣기도 할 만한 곳입니다. 벽 옆에 있는 마루 걸상에 짐을 부려 놓고 쉽니다. 교육관 바깥벽에는 <혼불>을 읽은 이들의 사연과 감상을 시화전 작품 마냥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교육관 옆에는 처마가 한껏 치켜 올라가고 널찍한 마루를 안에 품은 누각이 있습니다. 신을 벗고 올라가면 딴 세상에 온 것 같을 것입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넓은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신을 벗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지체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신을 벗는 행위입니다. 금세 다른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는 여유로움….

▲ 기념관 외벽 . 우산을 쓸까 말까 망설이게 할 정도로만 비가 내렸다. 기념관 안은 천장이 높다. 빗살무늬의 가로로 길쭉한 창도 높은 곳에 달려 있다. 숨구멍이 아닌 단지 빛구멍의 창.
ⓒ 박태신
교육관 옆에는 '새암 바위'라는 곳이 있고 그 곳에는 절절한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작가 최명희의 피멍 맺힌 글쓰기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 옆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언덕에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역시 철쭉을 가득 심어놓았는데 무슨 연유가 있는 것인지….

우산을 항아리에 넣고 기념관에 들어갑니다. 최명희의 육필 원고와 생전에 쓰던 만년필이 나타납니다. 저 두툼한 만년필로 1-2만 장의 원고지를 꾹꾹 눌렀겠지요. 생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비디오, 연표, 고백록을 봅니다.

안온한 안내방이 나타납니다. 한 중년의 안내인께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계십니다. 제 가방이 무거워 보였는지 친절하게도 가방을 맡아주십니다.

여러 개의 전시 부스 안에 만들어놓은 집과 인형이 예사롭지 않고 정밀합니다. 소설 속 대화 내용을 부스 앞에 다가가면 들려나오도록 장치했습니다. 소설 내용이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소설 속 주요 무대를 한바퀴 돌며 바라봅니다.

마지막으로 청암 부인이 2년 농사 망친 것으로 치고 만들었다는 저수지 청호지 주변을 거닐어 봅니다. 인적 드물고, 깨끗하고 수려한 저수지 주변을 거니는 맛이란….

인적 끊긴 옛 서도역

▲ 서도역. 인적이 끊겨 한적하지만 기품이 남아 있는 곳. 예전 시간표만 창 너머로 보였다. 담벽이 따로 없는 간이역.
ⓒ 박태신
서도역을 찾아갑니다. 먼저 수소문을 했지요. 길 건너 차길이 보이고 오래된 간이역이 보여 냉큼 철길 따라 걸었습니다. 철로 주변에는 잡초들이 많이 나 있었습니다. 역 가까이 가도 인적이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폐쇄된 곳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 역사는 저만치 뒤쪽에 있었습니다. 남원역처럼 새로 지어진 것인데 지금은 화물 운송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도역은 소설 <혼불>에서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효원이 전남 보성에서 신행올 때 내린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종가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지요. 보성역은 저도 가보았습니다. 지금도 보성에서 순천, 남원을 거쳐 용산까지 운행하는 열차가 있습니다.

서도역은 지금 남원시에서 매입하여 보존 상태에 있습니다. <혼불>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철거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1932년에 지어진 만큼 외관에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서도역 근처, 소파가 있는 일급(?)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운좋게 차를 얻어 탈 수 있었습니다. 퇴근 중이던 '혼불문학관' 직원께서 저를 발견한 것입니다. 오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물론이고요. 그렇게 기분 좋은 기억으로 한나절 남원 여행을 마쳤습니다.

다음엔 밤차로 단숨에 찾아간 함양과 그 곳의 상림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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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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