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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옥
화장실을 다녀온 그 사람은 곧장 나가지 않고 집안을 살펴보았답니다. 사실은 화장실이 급했던 게 아닌데 후배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있는 집치고는 책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엄마가 아이 교육에 너무 신경을 안 쓰네요"하고 핀잔을 주더랍니다.

방문판매원은 '교육세'를 들먹이며 "요즘은 교육세에서 아이들의 책값을 지원해주는데 그 혜택을 좀 보았어요?"하고 물었답니다. 당연히 후배는 혜택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고, 그 때부터 후배는 무언가에 씌인 듯 그 사람의 말에 홀딱 빠졌다고 했습니다.

견본으로 보여주는 책을 살펴보니 그림도 괜찮고, 딸아이다 보니 자연학습이 자칫 부족하기 쉬운데 한 질쯤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게다가 오래된 낡은 책까지 보상 판매하면 80여만 원하는 '자연관찰' 시리즈 80권을 36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살 수 있다고 했답니다. 결국 후배는 그 말에 넘어가 책을 사겠다고 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자 얼마 뒤에 전화를 받은 사람이 책을 두 상자 가져왔습니다. 후배는 3만원의 계약금을 걸고 나머지는 카드로 할부해서 결제했습니다.

방문판매원이 가고 나서 후배는 꺼내 놓은 책을 살펴보았답니다. 견본 책을 봤을 때는 정말 괜찮다고 느꼈는데 몇 권을 빼고는 질이 떨어지는 듯해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속았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반품하려고 전화를 했어,"
"그랬더니?"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거 있지."

후배는 방문판매원한테 "아줌마, 그럼 아까 왜 샀어?"하는 무서운 말을 들은 순간 자기가 진짜 책을 잘못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린이 책을 파는 사람이니 반품을 한다고 하면 이해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화부터 내니 말입니다.

반품은 절대 안 된다는 말만 들은 후배는 즉시 카드회사에 전화해 결제했던 카드를 정지시켰습니다. 판매업자는 다행히 그 때까지 카드승인번호를 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후배는 다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반품 못 받아줘요. 내가 일주일 뒤에 카드승인 따나 못 따나 보라구"하는 협박조의 말만 들을 뿐이었답니다.

카드를 정지시키기는 했지만 불안해진 후배는 카드 회사에 전화해 상담원에게 문의해 보았답니다. 상담원은 정지된 카드로는 승인을 못 딴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못 미더워 자꾸 확인 질문을 하니 상담원의 말꼬리가 명확하지 않더랍니다.

"제가 아는 한 승인을 딸 수는 없는데요. 간혹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따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후배는 상담원의 애매모호한 소리에 더 답답해졌답니다. 승인을 따려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안 될 일도 된다는 뜻 아니겠어요?

반품은 안 받아준다, 거기다 카드 승인까지 따고 말겠다는 방문판매원의 말에 후배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 되었답니다. 생각다 못해 소비자보호원에 상담을 의뢰했더니 소보원에서는 일단 카드회사와 판매업자에게 책을 반품하고 카드 결제를 승인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내라고 했답니다.

후배가 카드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담당자는 승인을 따지 않은 건이라 내용증명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했답니다. 판매업자에게 받아둔 명함에는 달랑 이름과 전화번호만 나와 있어서 내용증명을 보낼 수가 없고, 아무리 그 사람에게 전화해도 받지 않았답니다.

후배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카드 전표에 나와 있는 방문판매회사 이름을 대고 물어보았더니 모두 한통속인지 겨우 전화번호만 가르쳐 주더랍니다. 인터넷까지 살펴보고 나서야 쌍문동에 있는 총판의 실체를 알아냈답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방문판매원과 몇 차례 통화를 시도한 끝에 간신히 연결이 되어 후배는 회사로 찾아가 반품하겠다고 통보를 했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반품하더라도 계약금은 돌려주지 않을 뿐더러 카드 승인을 따겠다는 말을 다시 하더랍니다.

하도 기가 막혀 계약금을 못 받더라도 반품하겠다고 하니, 그제야 회사에 갔다 놓으라고 하더랍니다.

이튿날, 후배의 부탁으로 함께 낑낑대고 두 상자의 책을 반품하러 총판을 찾아갔습니다. 총판은 중고 아동도서 전집을 취급하는 곳으로, 직접 매장을 운영하면서 영업사원을 두고 방문판매까지 하는 듯했습니다.

반품 하러 왔다고 하니 회사 관계자가 기분이 안 좋은 듯이 말했습니다.

"기껏 책을 사더니 왜 반품을 해요?"
"물건이 맘에 안 들면 반품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랑 우리는 관계가 없어요. 그 사람들 다 사업자등록증 갖고 영업하는 겁니다."
"여기 물건이 나갔는데 관계가 없다니요? 그리고 카드전표에 이 집 이름이 나와 있는데, 그럼 이건 뭐예요?"
"그건 편의상 그렇게 한 거죠."

어디까지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총판 주인은 자기네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만 계속 했습니다. 반품을 하고 확인서를 써 달라고 하자 주인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만일을 위해 간단하게 물건 받았다는 확인서 한 장 써달라는 말이 그렇게 잘못인가요? 정작 화 낼 사람은 우리 소비자 아닌가요?"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후배가 포기했다는 계약금까지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계약금은 안 받는다고 했다면서요?"
"그 때는 책 판 사람이 하도 기가 막히게 나오니까 그랬죠."
"돈 받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계약금을 돌려줘요?"
"여기 물건 갖다 팔았는데 판 사람은 계약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하니, 그 사람에게 물건을 대 준 사람이 계약금을 대신 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못 줘. 이 사람들이 어디 와서 행패야?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

그 사람은 수화기를 들더니 전화번호를 돌렸습니다. '경찰'을 들먹이면 금방 물러설 줄 알았나 봅니다.

"경찰이요? 어디 한 번 불러 보세요 누가 잘못했나 따져 보자구요."

어이가 없어 그렇게 말하니, 그 사람은 전화번호를 누르다 말고 수화기를 내려놓습니다. 한참 더 실랑이하다가 주인이 귀찮다는 듯이 휭하니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따질래야 더 따질 수가 없어서 후배는 씁쓸하게 발길을 돌렸습니다.

후배가 직접 책을 갖고 가서 반품하지 않았다면 판매자는 "반품은 안 된다"며 시간을 끌었을 테고, 그러다 보면 반품 시기를 놓쳤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판매자는 소비자가 반품하러 오기 귀찮아서라도 포기하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는 길에 후배가 말하길 소보원에 전화했을 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세요? 다행히 책만 사고 끝났지만 몸도 상하고 도둑맞을 수도 있었다고요"라 하더랍니다.

이번 일을 통해 후배는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다며 앞으로 집으로 찾아온 낯선 사람에게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화장실 좀 가겠다"는 사람에게 작은 친절을 보였다가 온갖 마음고생을 했으니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후배가 책을 잘못 샀다가 반품하면서 경험한 일을 통해 올바른 상거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즘 방문판매가 많다 보니 순간적인 유혹을 못 이겨 상품을 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후배가 물건을 반품한다고 했을 경우 판매원이 좀더 합리적으로 대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서로 마음을 상하지도 않았을 테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필요한 책을 살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 방문판매원은 눈 앞의 작은 이익을 얻으려다가 후배한테 방문판매에 대한 불신을 심어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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