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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미 허물
ⓒ 박종인
산에 갔다. 나날이 푸름이 짙어가는 산 속에서 매미 애벌레의 빈 허물을 보았다. 그는 거기에 없었다. 허물벗기를 한 매미는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니다.

6~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다가 때가 되어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된 것이다. 때가 되면 애벌레가 탈피하여 성충이 되듯, 아이도 때가 되면 어른이 된다.

누에가 네 번의 잠을 자며 부쩍부쩍 자라듯이 아이들은 이태만 지나도 옷이 몸에 맞지 않아 새옷을 장만해야 할 정도로 쑥쑥 자란다. 하지만 1령의 누에나 5령의 누에가 마찬가지로 애벌레이듯 몸집이 커진 아이도 여전히 아이일 뿐이다. 5령의 익은 누에가 번데기를 거쳐 나방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어른인 성충이 된다.

사람은 언제 어른이 될까?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나이 스물이면 몸도 다 자라고 철도 들 나이기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물이 되어도 스스로 서지 못하는 어른애들이 많다. 스스로 선다는 것은 몸집이 크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활, 즉 경제적인 독립까지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스물이 아니라 서른이 되어도 부모의 젖을 떼지 못하는 어른애가 많다. 예전과는 달리 공부하는 기간이 길어져 20대 중반까지 학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나이 스물이 지난 자식이 별 거리낌 없이 부모에게서 계속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하는 것과, 또한 부모도 자식에게 경제적 지원을 마다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다.

▲ 싹튼 볍씨 하나
ⓒ 박종인
젖을 뗄 때는 매정해야 한다. 젖을 보챈다고 아이에게 계속 젖을 물리는 엄마는 결코 아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젖을 떼고 딱딱한 음식도 먹어야 하는 것이 생존하는 방법이다.

진정한 스승은 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듯 부모는 다 큰 자식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할 것이고, 자식은 부모의 도움을 당연시 여기기보다는 빚이라 여기며 실제로 갚겠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거듭남은 홀로서기다. 홀로서기의 첫걸음은 부모로부터 독립이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까닭은 뭘까?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는 까닭은 뭘까? 스스로 서기 위해서는 자신을 보호하던 껍데기를 벗어버려야 한다.

어린 시절에는 껍데기가 생명을 지키는 보호막이 된다. 가을의 씨앗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는 것도 껍질이 배를 감싸주는 덕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껍질을 벗어야 한다.

▲ 껍질 이고 싹튼 씨앗
ⓒ 박종인
봄이 되면 씨앗 속의 배는 씨껍질도 뚫고 배아를 틔운다. 만약 껍질을 계속 뒤집어쓰고 있다면 그 씨앗은 죽은 씨이거나 자랄 생각이 없는 씨다. 암탉이 품은 달걀은 21일 만에 병아리로 부화한다. 스물한 날이라는 때가 되면 알이 닭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병아리의 부화에 대해 조금 더 굽어보자. 예전에 텃밭에 닭을 몇 마리 키운 적이 있었다. 병아리를 사서 길렀는데 그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되더니 알을 낳고 품었다. 알에서 병아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였기에 부화일이 가까워지자 닭장에 자주 들락거리며 알을 살폈다.

드디어 알에 잔금이 갔다. 난 하던 일을 팽개치고 호기심 많은 에디슨처럼 닭장에 쪼그리고 않아 병아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알에 금이 가고도 한참을 지나서야 갓 깬 병아리를 대할 수 있었다.

병아리는 어떻게 알 밖으로 나왔을까? 답은 병아리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나온 것이다. 알에 금이 가고 병아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자 그동안 후줄근한 몰골로 지극 정성 알을 품던 암탉은 알을 두고 자리를 떠버렸다. 어미닭은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21일 동안 알을 품으며 온도를 맞추기 위해 제 깃털을 뽑아 맨살로 알을 감싸고 틈틈이 알을 굴러주며 정성을 다했다.

암탉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알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만약 껍데기 안이 편하다고 때가 되었는데도 껍데기 안에 계속 머무른다면 그 병아리는 죽고 말 것이다.

▲ 죽은나무와 산나무
ⓒ 박종인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세상은 온통 생명의 기운으로 흥겹다. 하지만 봄은 죽음을 확인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에는 어느 나무가 죽고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봄이 되면 알게 된다. 봄이 되어 나무들이 잎눈과 꽃눈을 뜨며 싹을 틔우는데도 겨울나무처럼 고즈넉이 서있는 나무는 죽은 나무다.

▲ 어린 제비꽃
ⓒ 박종인
봄엔 눈을 떠야 한다. 딱딱한 땅거죽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제비꽃을 누가 연약하다고 말하랴! 잎이 나고 꽃을 피워 씨를 맺어 퍼뜨리는 것이 야생초의 삶의 목표다. 들꽃의 생명력을 보며 야성을 북돋움받고프다. 민들레 한 씨가 수백의 민들레로 거듭남은 씨앗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 민들레 씨앗
ⓒ 박종인
해는 매일 아침마다 거듭난다. 오늘의 해를 어제의 해라고 우기지 말라. 어제의 네가 오늘의 네가 아니듯 우리는 매일 잠을 깨며 시나브로 자란다. 진정한 젊음은 매일 누에처럼 자라는 것이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말이다. 뽕잎을 먹듯 책을 읽고,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공짜는 부모가 주는 것이라도 거절하고, 넘어지면 오뚝이처럼 바로 일어나는 것, 스물 넘은 젊은이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 개미
ⓒ 박종인
20대의 홀로서기, 참 힘들다. 어제 낸 이력서는 면접관 눈길을 못 받고, 달포 전 응시한 시험은 또 낙방이고, 봐야 할 책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호박씨 까듯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은 물건 하나 사면 한 입에 털어버리고, 오를 나무는 끝이 보이지 않고 하늘은 흐리다. 어른이 되기보다는 그냥 아이로, 학생으로 계속 살고 싶은 맘이 들 것이다.

▲ 개구리
ⓒ 박종인
나의 이십대를 돌이켜본다. 스물이 되기 전부터 공장생활을 했고, 뒤늦게 대학 진학공부를 했지만 전문대도 떨어졌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신문보급소를 맴돌았고, 공무원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망스러웠으며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마음에서 비우고 살았다.

우울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기에 시간이라도 더디 가길 원했으나 세월조차 날 외면하여 금세 서른 즈음에 이르렀을 때 난 지나온 20대를 돌이켜보았다. 그 시절은 안개가 자욱한 들판이었다. 난 혼자였고 어스름한 길을 걸었다. 때론 왔던 길을 다시 오곤 했지만 쓰러지지 않기 위해 굴렁쇠처럼 움직였다.

▲ 악착같이 자라는 벼
ⓒ 박종인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지나온 과거는 돌이켜 볼 수 있다. 스물이라는 나이는 아이를 탈피하여 어른이 되는 시기이므로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강한 시기였다. 갓 껍데기를 벗은 어린 새처럼 다리가 부들거리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껍데기는 깨치고 나와야 한다.

젊은이는 아이가 아닌 어른이며 홀로서기가 가능한 때다. 부모의 껍데기 안에 계속 있는 한 서른이 넘어도 어른애로 남게 될 것이다.혹, 여건상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은행에서 대출 받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갚을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막연히 나중에 나이 들면 모시겠다는 생각보다는 월급을 타면 고정적으로 갚아나가겠다는 계획이 있어야 한다. 부모는 이미 어른인 자식을 아이로 대하지 말아야 하며, 어른이 된 자식은 더 이상 아이처럼 부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결혼은 홀로 선 둘이 하나로 다시 서는 것이다.

▲ 어린 새
ⓒ 박종인

덧붙이는 글 | 서울 <사랑의교회> 홈피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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