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 감자 꽃을 날렸습니다.
나를 갈구는 재미로 사시는 아랫집 할아버지가
나를 불러냈습니다.
겨우내 묵은 오줌을 고추밭에 퍼내는 나를
기어이 밭 가장자리로 불러내더니 말하십니다.
"감자 꽃 안 따고 어쩔 셈이여? 내가 작년에도 말 했짜녀?"
"할아버지 말씀 듣고 따려고 그랬죠 뭐."
"그래 그래. 지금 어서 따 줘. 잉?"
"예."
두 번째 리어카에 오줌통을 가득 싣고 가면서
낫을 한 자루 챙겨가서는 감자 꽃을 날렸습니다.
감자 꽃은 달밤에 보면 이쁘기가 처참합니다.
소복같이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흰 감자꽃잎은
서러운 사연을 품은 처녀귀신 같습니다.
낫으로 휙휙 날리면서
동물병원에서 중성화수술을 받던 우리 진돌이 생각도 나고
조선시대 거세당하고 살아야 했던
내시 생각도 나고
아.
같은 신세인 내 '거시기' 생각도 났습니다.
감자 꽃에 씨가 맺히면 감자가 얼마나 부실해진다고
이렇게 모진 짓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 해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감자 한 포기는 꽃을 남겨 두었습니다.
까만 씨가 맺히도록 놔 둘 생각입니다.
모든 감자들이 두 눈을 치 뜨고
응원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너만 믿는다. 부디 부디 소 불알만한 감자를 주렁주렁 맺거라."
자주감자는 자주 꽃이 핍니다.
자주꽃이 피었으면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입니다.
그래도 파 봤습니다.
소 먹이고 풀 베던 코흘리개 시절에
감자서리 해 먹던 실력을 발휘해서
순이 제일 좋은 감자를 하나씩 골랐습니다.
자주감자 한 포기.
하얀감자 한 포기.
감자 둑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헤비작헤비작 파고 들어가서
흙을 사알살 긁어냈습니다.
새하얀 여자 엉덩이처럼 감자가 한 알
쏘옥 드러났습니다.
"아니 벌써?"
혹시나 했는데 달걀만한 감자알이 있었습니다.
영농일지를 보니 3월 6일 날 감자를 심었습니다.
석 달 열흘.
꼭 100일이면 감자를 캐는 법인데
벌써 그렇게 되어 갑니다.
캄캄한 땅 속에서 달력은 언제 보고
저렇게 여물었는지
어리둥절합니다.
자잘한 감자덩이들은
다시 흙으로 감쪽같이 묻었습니다.
자주감자는 발그레한 새악시 얼굴로 나왔습니다.
자꾸 자꾸 감자알을 빼내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집에 와서 왕소금을 뿌리고 삶았습니다.
나는 보기만 했습니다.
나는 지금 단식중이기 때문입니다.
첫 북주기
두벌 북주기
세벌 풀매기
고단했던 노동이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감자 찌는 냄새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