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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으려는 그를 휴대전화 벨소리가 잡아당겼다. 그는 통화하는 내내 자못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 여야간 협상에서 덧칠로 뭉개지는 중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의 김동춘(47) 교수는 지금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지요. 본래 취지가 훼손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대안이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이지요. 한계가 있는 법안을 받을 것이냐 개별 법안 대로 갈 것이냐…. 결론적으로 이 법은 거부 투쟁하는 것으로 전달했습니다."

덧칠로 뭉개진 과거사법, 뭉개지는 진실과 화해

그는 과거사법이 끊임없는 정쟁을 유발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고 우려한다.

▲ 김동춘 교수
ⓒ 인권위 김윤섭
"피학살자 조사하겠다고 하면 야당은 여순반란사건으로 좌익 폭동을 조사하겠다고 하고, 그렇게 날마다 싸우면서 과거사 청산은 물타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국민은 화해하려고 법 만든 거 아니냐, 그런데 왜 싸우기만 하느냐 그럴 것이거든요. 국민은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모르니까, 별문제 없이 잘 되겠지 했겠지요…. 우리로서는 미래가 보이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9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안'을 위한 통합법이 만들어지기 5년 전부터 김 교수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일해 왔다. 그는 6·25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 희생에 대한 진실을 밝히자고 주창한 장본인이며 제안자다.

"6·25전쟁 50주년이 돼 냉전적 시각으로 보지 말고 다르게 접근하자는 목소리가 나올 때도 되었는데 아무 데서도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요. 한심스러워서 학술행사를 하자고 제의했지요. 민간인 학살 피해자 문제를 사회적으로 의제화하고 진상 규명의 입법 작업을 해온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린다.

"100만, 적게 잡아도 50만의 목숨이 좌우익 대립으로 희생됐어요. 좌익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밝혀졌고 이미 서훈을 받은 상태지만, 국군이나 경찰에 의해 빨갱이로 지목받은 이들은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기는커녕 연좌제로 30여년간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해서 그들의 명예회복을 하지 않는 한 인권 수준은 진전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국가폭력에 대해서 정리하지 않는 한 자유권이라고 말하는 생명권이 공권력에 의해서 유린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입니다. 군사정권하 의문사 문제도 6·25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좌익 혐의로는 죽여도 좋다는 논리가 1980년대까지 온 것이니 사실은 같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군사정권하의 의문사는 알아도 6·25 당시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지요."

1960년대 사회운동, 노동자 연구, 분단, 6·25전쟁 등 '우리'를 들여다보는 그를 가리켜 '행동하는 학자'라고 한다. 흔히 학문을 하는 이들은 이론의 틀 속에 갇히기 십상이지만 그의 이론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의 학문적 이론은 운동으로, 또 그의 활동 영역은 언제나 다시 이론의 장으로 즉각 연결되고 있다.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문제는 '판도라의 상자'

"누구는 대학교수가 된 것을 '위장취업'이라고 했지만, 제 경우는 그 정도는 아니라도 학문 자체를 위해서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학자나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실천 활동과의 연관성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글을 써 온 것이지요. 이론적으로 탐구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요. 급한 일이 많아서."

하지만 이미 여러 권의 탁월한 저서를 펴낸 그를 역량 있는 학자로 지목하는 데 이견이 있을 리 없다.

▲ 김동춘 교수
ⓒ 인권위 김윤섭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제 글이 쓰다 만 글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자신이 유일하게 이견을 달고 싶은 모양인데, 학문에 대한 그의 진정한 욕심이라고 읽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연구와 활동 사이에서 늘 마음이 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학문과 운동 그 어느 쪽에도 전념하지 못하는 자신을 고민한다.

"우리 나라에서 활동은 늪이지요. 적당히 활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활동을 하면 늪처럼 빠져들게 되지요."

이번에 과거사법이 통과되면 그는 자신의 임무가 '여기서 끝'이라고 잘라 말한다. 아마 그만의 '희망사항'이 아닐까 싶다. 사회학자이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이 부분을 공부하는 동시대인에 대해서 특별한 자부심이 있다.

"우리 세대가 한국에서 현대사를 제도권으로 올린 당사자입니다. 제도권에서 하지 않은 현대사 연구를 운동권에서 밀어붙여서 제도권으로 올린 것이지요. 책도 번역하고 세미나도 하고 논문으로 반영하고 커리큘럼으로 집어넣고 했지요. 현대사의 공백인 좌우 이념과 관련된 부분, 그 금기를 깬 당사자들인 것이지요."

그의 책 중에 <근대의 그늘>이 있다. 그 제목을 자신이 붙였다. 그는 이 땅에서 '그늘'의 의미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예민하고 인간주의적인 시선으로 천착해 온 학자다. 고통과 한으로 얼룩진 그늘을 살피자면 끈질긴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학문으로 승화시키기까지 어떤 각오나 노력이 있었을까?

"저 개인적, 가족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운동을 하다 보니 한국사에 대해서 수구보수 세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잘 알게 되었지요. 6·25전쟁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안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앞서서 알게 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제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활동과 연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김 교수는 과거사법이 우리들을 그 그늘에서 나오게 하는 데 왜 필요한지를 거듭 역설한다.

"그동안 현장을 다니면서 많은 인터뷰를 했어요. 그중에 6·25전쟁 당시 학살 가해자였던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녹음기 등 일체 도구를 가져오지 말라는 조건으로 만났지요. 직접 총을 들고 죽인 사건을 얘기했는데, 다시 만나기로 한 두 번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죽을 날 다 되어서 왜 이러냐고 남편을 말리는 바람에…. 결국 얘기를 다 듣지 못했지요. 사람들 중에 혹시 나와서 증언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나가겠다, 신변을 보장받을 수 있으면 증언하겠다, 그러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왜 과거사법이 통과되어야 하는지 절실하게 느낍니다. 현장 사람들을 만나 보면 그런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과거사의 그늘에서 빠져나오는 법

▲ 김동춘 교수
ⓒ 인권위 김윤섭
그는 '지금' 왜 이 일을 매듭짓는 것이 중요한지 말했다.

"우선 피해자가 살아 있을 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10년이면 6·25전쟁 피해자 1세대는 거의 죽습니다. 당사자나 배우자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명예회복 같은 가시적인 화해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 청산은 도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 힘이 언제나 생기는 게 아닙니다. 노 대통령의 의지와 그 당위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과거사를 세월 없이 붙들고 있을 수도 없고, 미룬다고 미룰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과거사법으로 우리는 어떤 한 시대를 일단락 지을 수 있을까.

"과거사 청산은 사회적 치료입니다. 공개적으로 크게 우는 것이지요. 피해자들에게 그간 고생 많았다, 힘들었다 하며 사회적으로 다독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차별받았습니까, 죽고 죽이고 떠나 버리고, 벌레 취급하고…. 그 한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국가가, 지역사회가 다독이는 것으로 사회 치유 효과가 있고, 사회적 통합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물론 상처가 덧날 위험성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한다. 아무리 사소한 자료도 꼼꼼히 챙기고 시간의 틈을 메우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다. 어떤 책을 목표로 두면 매일 아침 한두 시간은 꼭 글을 쓰는 데 바친다.

"일을 즐기고 좋아서 하는 것이지 헌신과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간이 나면 가만가만 스케치도 하고 기타도 튕겨 본다. 미대에 갈 뻔했고 노래도 곧잘 부른다는 그는 엄청난 열정과 감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학자의 열정에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와 함께 하던 동지들과 만나기 위해. 그의 걸음은 느리지 않았는데 내 눈에는 그가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았다. 빠르진 않지만 너무나 확실해서 분명히 각인되는 행보. 그 걸음을 따라서 한 줄기 긴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5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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