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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의 우체통은 새집이다. 배달부 아저씨는 이곳으로 편지를 넣지 않는다. 아이들은 매일 들여다보면서 저절로 자연공부를 한다.
송씨의 우체통은 새집이다. 배달부 아저씨는 이곳으로 편지를 넣지 않는다. 아이들은 매일 들여다보면서 저절로 자연공부를 한다. ⓒ 이우성
그는 오늘도 몸으로 환경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들일을 한다. 오늘도, 내일도 사람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마을 전체가 환경농업을 할 수 있도록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다행히 변화의 바람은 있다. 그 작은 깃발을 믿고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그의 투박한 발걸음으로 곧 몇 년내 이 마을이 새롭게 변할 것을 본다.

송씨는 이곳이 고향이다. 여덟 살까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 살았다.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가 살다가 5년 전 할아버지를 돌보러 내려오신 아버지가 그만 경운기 사고로 돌아가시자 아흔이 넘은 할머니와 일흔이 넘은 어머니 단 둘이 이 집을 지키게 되었다.

형광등 하나도 제대로 못가는 노인네들만 집에 방치한 것 같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부인 김애경씨를 설득했다.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네들을 방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설득해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33년만의 귀향

그는 한국외국어대 아프리카어를 전공했다. 학생 때 학생운동도 활발히 했다. 그때 운동하던 친구들이 요즘 그의 쌀 주소비자들이다. 학교 졸업 후 그는 엉뚱하게도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판매 사업을 했다. 꽤 잘 되었다. 의료기 사업도 했고 일본에 수출도 했다.

그러나 사업은 번창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사람 냄새가 없는 것이 항상 아쉬웠다. 사기꾼도 많이 만나고 힘들고 괴롭기도 했다. 언제든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훌훌 던지고 결심을 앞당겼다. 3년 전 이웃한 성원면에 폐교를 빌려 도시 아이들에게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연학교를 8개월 정도 하다가 이 집으로 들어왔다.

우체통 안 모습. 어른 몸집 만한 박새가 좀 거만하게 앉아 있다.
우체통 안 모습. 어른 몸집 만한 박새가 좀 거만하게 앉아 있다. ⓒ 이우성
이곳 두곡마을은 송씨 집성촌이다. 옛날에는 100호 정도 송씨가 있었는데 지금은 6가구만 남았고 외지 사람이 많다. 농사짓는 분들은 거의 60대 중반. 살면 얼마나 살겠냐며 농약 안 치면 농사가 안되는 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농약 반, 비료 반으로 농사짓는 분들뿐이었다.

송씨는 이곳에 들어와 외롭게 환경농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6월부터는 환경농업 작목반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마을 안에서 환경농업을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막걸리 값만 수억 들었다. 동갑내기 유일한 친구 이하진씨와 두 명이 모이기 시작해 수차례 회의를 가졌다.

처음 송씨의 논에 벼가 안 커서 노랗게 변하자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다. “그렇게 하면서 떼 돈 벌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얘기들을 했다. 모두들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에게 쌀을 보내는 처지였으므로 자식들에게 독약을 먹일 수는 없는 일 아니냐는 얘기에 몇 분들이 수긍을 해주었다.

그래서 지난해 추수를 마치고 관심을 보이는 분들 16명이 모여 ‘두곡리친환경농업작목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 인식의 허공이 너무 깊다. 이 지역 공무원들의 환경농업에 대한 인식도 낮다. 친환경농림지원사업도 획일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못마땅했다. 불량 자재들을 지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지난해 관공서와 꽤 많이 싸웠다. 농민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사업에 지원해 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올해 처음으로 자신들의 건의를 받아주었다.

올해 횡성군내에 100여명 환경농업 하는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횡성군친환경농업협의회’도 만들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조직적으로 한 번 내보자는 생각으로 첫 걸음마를 내딛은 것. 인증 받은 농민들만 45명이다. 친환경농업 예산을 정당하게 집행하는지 감시하고 서로의 유기농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한다. 송씨는 이곳에서 자료연구회 회원이다.

두곡리는 총 50ha의 농지가 있는데 3분의 2 정도가 임대농이다. 토지 세트장이 들어와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농민들에게는 천추의 한이다. 땅을 비싸게 주고 사서 농사 지은들 무슨 소용이랴. 아예 농민들은 땅을 살 엄두를 못 낸다. 송씨는 서울에서 사업할 때 괴로움보다는 지금의 괴로움을 즐기는 듯하다. 애초 이곳에 내려와 가진 출발의지 대로 살고 있는지 요사이 고민한다.

그는 논 6000평에 무농약 벼농사를 짓고 있다. 송씨 문중땅이고 인증 받은 10마지기(1마지기 150평)만 자신의 땅이다. 자급용 밭도 500평 있는데 주로 고추, 들깨, 옥수수, 콩을 심는다. 밭농사는 주로 어머니가 하고, 원주의료생협에 다니는 아내도 일요일만 도와준다.

실제로 농사짓는 형식은 전환기유기재배인데 관행재배지에 둘러싸여 있는 재배환경 때문에 진정한 유기농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인증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환경농업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므로 땅을 살리고 생산물을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

송씨의 뒷뜰은 손님접대용 식탁이다. 바로 옆에서 푸성귀를 뜯어 바로 고기쌈을 먹을 수 있다. 송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인은 아직 퇴근전이라 함께 하지 못했다.
송씨의 뒷뜰은 손님접대용 식탁이다. 바로 옆에서 푸성귀를 뜯어 바로 고기쌈을 먹을 수 있다. 송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인은 아직 퇴근전이라 함께 하지 못했다. ⓒ 이우성
서울에서만 자란 아내에게 귀농 후에 바로 농사일을 시키면 갈등이 생길 것 같아 나름대로 머리를 짰다. 아내는 서울에 있을 때에도 서울의료생협에서 일을 했는데 송씨가 연줄연줄 대다 보니 원주의료생협에 닿아 아내를 그곳에 취직을 시켰다. 차츰 시골에 적응이 되면 스스로 농사를 지을 것으로 생각했다. 버스 출퇴근을 하는 아내는 지금 의료생협 일에 매여 오히려 일에 파묻혀 산다. 그러나 일요일은 어김없이 농사일을 돕는다고.

초등학교 6학년 딸 주명이는 재래식 화장실 적응이 어려원 울기도 많이 울면서 적응이 쉽지 않았는데 4학년 아들 태현이는 시골에 와서 천국을 만난 것 같았다. 그러나 송씨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산나물도 함께 캐거나 가족이 함께 아름답게 키우는 농작물을 보면서 스스로 적응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송씨의 집에는 우체부아저씨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지 않는다. 우체통에 박새가 새끼를 낳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행여 다칠새라 조심조심 새들을 보호한다. 이런 감동이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적응시키리라 그는 믿는다.

그는 논농사에 사력을 다한다. 혼자 일을 다 한다. 지난해에는 오리로 제초를 했고 올해는 쌀겨로 할 생각이다. 쌀겨농법은 횡성군에서 송씨가 처음이다. 이앙 후 일주일 사이에 단보당 200~300kg의 쌀겨를 뿌린다. 논둑을 30cm 이상 높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눈둑 쌓다가 허리가 끊어진다.

자신은 모 분얼 직전까지만 물을 대면 되므로 20cm 정도로 높였다. 이앙은 5월 28일 했다. 분얼기에 접어들어 잎이 갈라지기 시작할 때 물을 빼고 논을 말려준다. 이때 땅도 숨을 쉬고 미생물도 산소호흡을 한다. 이후 나오는 풀은 중경제초기로 두 번 정도 매준다. 자급하는 밭에는 집에서 40마리 정도 키우는 닭에서 나온 계분을 뿌리고 호밀멀칭과 짚 피복으로 제초를 한다.

지난해 150평 한 마지기 당 2가마 반이 나왔다. 동창들이 적극적인 호응을 해주어서 쌀이 모자라 못 팔 정도였다. 관행의 3분의 2 정도. 화학비료도 전혀 주지 않고 키웠다. 모두 3000평에서 48가마가 나왔는데 친구들에게 한 가마에 21만원을 받고 팔았다. 운동을 하거나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아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데 그런 친구들이나 방과 후 학교인 성남푸른학교에 18만 원에 팔았다. 그래서 올해 친구들을 믿고 지난해보다 면적을 늘였다.

환경농업을 향한 송씨의 쉼없는 발걸음이 이 지역을 바꿀 것을 믿어도 좋다. 그의 정신이 한없이 넓으므로.
환경농업을 향한 송씨의 쉼없는 발걸음이 이 지역을 바꿀 것을 믿어도 좋다. 그의 정신이 한없이 넓으므로. ⓒ 이우성
도시에 40가구와 끈을 맺으면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거대해진 생협조직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런 모습의 직거래가 훨씬 건강한 조직이라고 말한다. 지금 실험적으로 성남민노당 당원 2000명과 온라인을 구축해 이곳 작목반과 연결해 지속적인 도농교류를 할 생각이다.

지난해 수입은 영농비 빼고 1000만 원 정도. 시골와서 씀씀이도 많이 줄었다. 겨울 연료비와 아이들 급식비가 제일 부담이 큰 데 연탄보일러로 바꾸었더니 연료비 절감이 크게 된다. 아내가 좀 보조하고 어머니 국민연금 타는 것 해서 어찌어찌 생활은 된단다.

처음 이곳에 와서 유기축산을 해 볼 생각이 있었다. 실제로 산밭을 빌리기로 하고 구두 약속까지 했는데 그 앞에 토지 세트장이 들어서자 땅주인이 마음이 바뀌었다. 언젠가는 유기축산과 유기벼농사를 결합해 순환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환경농업에 대한 의지를 가진 젊은 사람이 없는 것이 제일 아쉽습니다. 답답합니다. 농촌고령화를 실감합니다.”

그는 이제 두곡리 마을 모든 사람이 친환경농업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곧 후계농업인 자금을 받게 되어 논에 하우스를 지을 생각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농가소득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머리 싸매고 연구할 생각이다. 그걸 자신이 몸으로 보여줄 생각이다. 그래야 관행에 젖은 분들을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진정한 생태주의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다. 근본 양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생산문제의 변화가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농촌공동체 생산양식을 복원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목표와 자세를 갖고 있어야 귀농해도 실패하지 않으며 귀농자의 의무라는 확신이 있다.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그런 자연관에 기본을 두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그는 왜 벼농사를 지을까. 인간문화가 사라진 세상, 두레나 품앗이가 사라진 농촌에 가장 기본이 되는 먹을거리, 쌀 생산현장만은 지켜야 한다는 그의 정신이 쌀을 택했다. 그리고 환경농업의 길을 외롭게 시작한 것이다. 그가 걸어가는 길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까. 마을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는 오래도록 벼농사를 지을 것이다. 쌀은 생명이므로, 그의 정신이므로.

덧붙이는 글 | 척박한 환경농업의 토양을 기름지게 하려는 젊은농부의 몸짓이 이 땅에 큰 수확으로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흙살림(www.heuk.or.kr)신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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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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