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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24일 서울 구로공단에서는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가 '노조탄압결사투쟁선언문'을 발표하고, 김준용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구속에 항의하는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파업의 불길은 구로공단 내 10여개 사업장으로 번졌고 대학생과 사회단체의 연대투쟁이 뒤따랐다.

그 뒤 닷새째 진행됐던 이 '구로동맹파업'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적 동맹파업'으로 기록됐으며 서울노동연합(서노련),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민주노총 등 민주노조건설운동으로 이어졌다.

구로동맹파업은 44명의 구속자를 남겼는데, 이중 한 여성 노동운동가는 쟁의조정법 위반, 제3자금지법 위반, 집단방화, 집단폭력 사주, 집시법, 국가보안법 등 무려 11가지 혐의로 500만원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가 됐다. 이후 그는 서노련, 전노협을 거쳐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무처장이 됐고, 지난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이 되어 '노동운동가 심상정'에서 '의원 심상정'으로 변신했다.

▲ 80년대 수배 시절의 심상정 의원. 심 의원 측은 "(배경 때문에) 농민운동가 같아 보인다"는 기자의 항의(?)에 "수배 중이었던 때라 사진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 심상정 의원실
"밥 먹듯 철야 하고도 한달에 8만원... 김우중이 1000만원 주며 노조 회유"

지난 80년, 대학을 졸업한 심상정 의원은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했다. 심 의원은 카세트 외장을 인쇄하고 PCB 부품을 설치하는 대동전자와 남성전기 등을 거쳐 대우어패럴 미싱사로 다시 취직했다.

당시 현장은 심 의원이 학교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혹독했다. 그는 한여름에 미싱기, 다리미, 프레스기 등 각종 기계열에 시달리면서 모피를 만들었는데 1시간 정도 일을 하면 가운이 다 젖었고 오후까지 일하면 발이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고 한다. 사업장은 먼지가 날린다며 선풍기도 틀지 않았고 양동이에 공업용 얼음을 넣고 가루주스를 풀어 음료수를 만들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오후에 일하고 학교에 갔다가 다시 철야작업을 하던 10대 초반 노동자들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다리미에 손을 데거나 미싱에 손이 찍혀 병원에 실려가곤 했다. 미싱사나 시다는 주로 여성노동자였는데 관리자의 욕설이나 성희롱은 일상다반사였다. 심 의원이 그렇게 한 달 동안 일해서 받은 돈은 8만원이었다.

당시 다른 사업장들처럼 대우어패럴에서도 민주노조 건설은 가시밭길이었다. 사측은 협박, 감금, 폭력, 납치 등을 일삼으며 노조를 탄압했다. 김준용 노조위원장은 현장순회 도중 구사대에게 맞고 옷이 찢겨 알몸으로 끌려나오곤 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주먹으로 맞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심 의원의 당부를 지켰다.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도 직접 노조 회유에 나섰다. 심 의원은 "김 회장이 노조에 1000만원을 주면서 회유를 시도했고, 직접 노조와 합의를 마친 뒤 뒤집는 일도 있었다"며 "노동착취와 정경유착을 통한 특혜 속에서 재벌이 성장하지 못하면 그게 이상한 것"이라고 일각의 '김우중 경제기여론'을 일축했다.

▲ 지난 2004년 4월 15일 밤, 심상정 비례대표 후보의 아들 이우준군이 축하 꽃다발을 들고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 마련된 총선 상황실에 엄마의 당선을 미리 축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정규직 중심 양대노총 구조개혁해야... 민주노동당 독자적 노동정책 없다"

심 의원은 구로동맹파업의 의미로 '기업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민중연대' '경제적 요구에 앞서 정부의 노동탄압에 항의한 정치성' 등을 꼽았다. 또한 그는 '이후 대안과 전망의 부재'를 구로동맹파업의 한계로 지적했다.

이같은 진단은 20년이 지난 현재의 노동운동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최근 제기된 '노동운동 위기론'에 대해 심 의원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양대 노총의 대기업 정규직 중심 체계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며 "구로동맹파업의 정신인 계급적 연대와 단결의 원칙 속에서 양대 노총의 구조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 의원은 구체적인 노동운동의 개혁과제로 조직율 확대와 산별노조 건설, 노동자 정치세력화 등을 꼽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비정규직 문제. 그는 "민주노총이 대의기구에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 이주노동자를 할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심 의원은 당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노동정책이 없고 비정규직 사업도 민주노총을 지원하는 수준"이라며 "집권을 위해서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종합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던졌다.

심 의원은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70만 조합원뿐 아니라 810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함께 대변하는 정당으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며 "당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회 들어와 가장 예뻐진 의원" 심상정과 '전노협 반지'

인터뷰 내내 비정규직 문제를 강조하던 심 의원은 '구로동맹파업 20주기' 기념주간인 올해 6월 셋째주 내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회의실을 지켰다. 비정규직 법안 심사를 막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실력 행사에 참여한 것이다.

심 의원은 환노위 소회의실 의자에 앉은 채로 보좌진들에게 상임위 안건보고를 받았고, 맞은편에 앉은 천영세 의원단대표와 원내 주요 현안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다. 그는 국회 재경위원회와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의원단 수석부대표로 원내 전략을 짤 뿐 아니라 다른 당 수석부대표와도 협상을 벌이고 있다.

원내에 들어온 지 1년, 심 의원은 얼마 전 재경위 동료 의원으로부터 "국회 들어와서 가장 예뻐진 의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청바지에 조끼, 운동화 차림의 '심 처장'은 국회 들어와서 오랜만에 다시 치마를 입었고 화장을 했고 염색도 했다. 그는 "오랜 노동운동 동안 누적된 이미지 때문에 상대적으로 파격으로 느껴지는 듯 하다"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변화는 그 뿐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항상 긴장하게 됐고, 당이나 원내에서 요청하는 일정이 많아 자신의 의지대로 활동 스케줄을 조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예전에는 늦게 일하고 다음날 늦게 나왔지만 이젠 늦게 들어가고 일찍 나오게 됐다. 노동운동을 그만 두면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질 거라던 아들(이우준군)의 기대도 무참히 깨졌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심 의원이 노동운동에서 그랬듯이 원내에서도 '교섭'을 전공으로 하고 있다. 그는 "조직이나 정치력에 한계가 있어서 원내 교섭이 훨씬 어렵고 어느 정도 개인기가 필요하다"고 평가했고 자신의 강경한 말투에 대해서 "소수 정당이 원내에서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날을 세우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또 하나 변하지 않은 것. 그의 손에는 지금도 결혼반지 대신 '전노협 반지'가 끼워져 있다(단병호 의원도 이 반지를 끼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심 의원에게 "노동운동을 안 했다면 무엇을 했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며 "이게 천직인 것 같다"고 답했다.

▲ 2004년 11월 국회 재경위의 국세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국세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이 이용섭 국세청장에게 불법정치자금 과세문제에 대해 질의를 하고 있다. 심 의원 손에 있는 금색 반지는 결혼반지가 아닌 '전노협 반지'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만 하자"던 김문수, 여학생휴게실서 쫓겨난 심재철
국회에 포진해 있는 심상정의 옛 '동지'들

17대 국회에서는 현장에 투신했던 노동운동가 출신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민주노동당은 물론이고 김문수·원희룡(한나라당)·송영길·유시민(열린우리당) 의원 등 80년대 위장취업자들이 다수 눈에 띈다.

지금은 소속 정당도 이념도 다르지만 80년대 이들은 현장의 동지였다. 심상정 의원은 한때 김문수· 유시민 의원, 박노해 시인 등과 함께 서노련 활동을 주도했다.

김문수 "노동자정당 건설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구로동맹파업 당시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던 김문수 의원은 사업회 사무실을 파업 상황실로 흔쾌히 내줬다. 이후 구속돼 고문을 당하던 중 심 의원의 거처를 추궁받기도 했다. 그러나 86년 서노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김 의원은 심 의원에게 "노동자정당이 건설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전망 없는 활동 그만하자"고 '충고'했고 민중당으로 떠났다.

심 의원은 "고난의 시절 가장 큰 힘이던 동지들이 하나둘 떠나가던 때가 가장 가슴아팠다"고 회상한 뒤 "그들은 노동자·서민이 우리사회의 중심이라는 확신을 버린 것"이라며 "이는 결국 엘리트 사관"이라고 꼬집었다.

심 의원은 "현재의 가치관이나 지향을 평가하면 되지, 과거의 김문수, 유시민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며 "인간적으로 만나면 이야기가 통하는 분도 있다"고 덧붙였다.

심 의원은 노동운동뿐 아니라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과도 친분을 쌓고 있다. 그가 '대문' 혹은 영어로 '게이트(Gate)'라고 불리던 서울대 대학문화연구회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학문화연구회'의 약칭인 '대문'은 1980년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요 인물을 배출해냈고 이들은 현재 정재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게이트'로 불리던 '대문'출신들... 서울대 최초의 여학생회 건설

심 의원과 함께 활동한 '대문' 출신 정치인으로는 박종운 한나라당 국가발전전략연구회 사무처장, 김민석 전 민주당 의원 등이 있고, 대문의 전신인 '청넝쿨'출신으로는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장 등이 있다.

심 의원은 "여학생들은 운동가로서의 역할에서 배제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서울대 최초의 여학생회를 만들기도 했다. 심 의원은 "당시 학생회장 후보였던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이 노크도 없이 여학생휴게실에 들어와 외투를 던지고 소파에 주저앉더라"며 "순간 외투를 가슴에 처박고 내쫓아버렸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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