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미술관 '사전트 갤러리'의 전경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미술관 '사전트 갤러리'의 전경 ⓒ 정철용
1919년 9월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작은 도시에 소재하고 있는 미술관답지 않게 넓은 전시 공간과 수준 높은 소장 작품들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이 누리고 있는 명성의 절반은 미술관의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전시장을 다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와 다시 바라보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흰색 미술관 건물은 과연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 부를 만했다. '20세기에 지어진 소형 미술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의 하나'라는 여행 안내책자의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여행 안내책자에는 이 미술관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건물로서 로열 왕가누이 오페라 하우스(Royal Wanganui Opera House)를 소개해 놓고 있었다. 1899년에 건립된 830석의 극장으로 콜로니얼 스타일의 외관이 수려한 목조 건물이라고 했다. 지도를 보니 미술관에서 불과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어서 우리는 빅토리아 애비뉴를 걷기 전에 우선 이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가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페라 하우스의 문은 닫혀 있었다. 토요일이어서 일찍 문을 걸어 잠갔거나 아니면 공연이 없는 날인 모양이었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의 아름다움이 그 외관에서 오는 것인 반면 오페라 하우스의 경우에는 그 내부 장식의 화려함과 정교함에서 오는 법인데, 그 아름다운 내부를 구경하지 못하게 되니 적잖이 아쉬웠다.

한 세기 전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은 미술관과 오페라 하우스 뿐만이 아니었다. 중심가인 빅토리아 애비뉴로 접어 들었는데도 현대식 고층 빌딩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2∼3층 짜리 낮은 건물들만이 눈에 띄었는데 그 건물들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곳곳마다 오래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왕가누이의 도심. 건물 위쪽에 건립연도로 보이는 듯한 숫자가 쓰여 있다.
곳곳마다 오래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왕가누이의 도심. 건물 위쪽에 건립연도로 보이는 듯한 숫자가 쓰여 있다. ⓒ 정철용
파스텔 톤의 잔잔한 색상으로 채색이 되어 긴 세월의 흔적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건물의 양식이나 벽에 씌어져 있는 숫자(건축연도)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왕가누이에는 도심에만도 약 30여 개에 달하는 유서 깊은 건물들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된 독특한 관광상품이 있을 정도이다. '브라스 러빙 헤리티지 트레일(Brass Rubbing Heritage Trail)'이라고 불리는 이 관광상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지도와 함께 동판 탁본용 종이와 황금색 크레용을 구입해야 한다.

여행객은 지도에 표시된 유서 깊은 건물들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감상하고, 구입한 종이와 크레용으로 그 건물들과 유적지마다 설치되어 있는 명판들의 탁본을 뜨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왕가누이 여행을 추억하는 기념물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빅토리아 애비뉴에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건물 몇몇을 그저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가 왕가누이의 도심에 들어선 시간이 늦은 오후여서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도 했지만, 단번에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원 같은 도심의 거리

그 아름다움이란 바로 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꽃바구니들이었다. 2km가 조금 넘게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는 빅토리아 애비뉴는 초가을 늦은 오후의 엷은 햇살 속에서 화려한 꽃바구니들로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에, 화분 받침용 철골 구조물에, 횡단보도에 세워 놓은 기둥에, 상점의 간판 밑에, 눈길 가는 곳마다 수없이 많은 꽃바구니들이 매달려 있었다.

빅토리아 애비뉴의 꽃바구니 장식
빅토리아 애비뉴의 꽃바구니 장식 ⓒ 정철용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눈부신 여름을 축하하기 위하여 1000여 개에 달하는 꽃바구니들로 빅토리아 애비뉴를 비롯한 도심의 거리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이 프로그램은 '활짝 핀 왕가누이(Wanganui in Bloom)'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왕가누이의 오랜 전통이며 자랑거리이다. 우리가 왕가누이를 찾은 시기가 4월 중순이었는데도, 빅토리아 애비뉴에는 아직도 그 꽃바구니들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카페와 레스토랑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도 드물고 차량 통행마저도 뜸해서 토요일 오후의 도심의 거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지만, 이렇게 매달아 놓은 꽃바구니들의 열렬한 환영인사로 우리는 즐거웠다.

횡단보도도 꽃그늘 아래에 있다.
횡단보도도 꽃그늘 아래에 있다. ⓒ 정철용
번잡한 도심이 아니라 마치 공원의 한가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빅토리아 애비뉴는 아름다웠다. 우리는 빅토리아 애비뉴의 끝에서 유턴을 해서 반대편 도보를 걸어 내려왔다.

어둠이 내리려면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멋스럽게 생긴 가로등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한때 가스로 불을 밝혔다는 이 가로등들은 지금은 전기로 점등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이 가로등을 밝혀주는 것이 가스도 아니고 전기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가로등 양쪽 기둥에 걸어 놓은 꽃바구니가 벌써 오래 전에 화사한 꽃불을 밝혀두었으니 말이다.

불 밝힌 가로등보다 양 옆에 매달린 꽃바구니가 더 환하다.
불 밝힌 가로등보다 양 옆에 매달린 꽃바구니가 더 환하다. ⓒ 정철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