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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지나가는 계절, 장마가 오기 전의 덥고 답답한 날씨는 이곳 합천을 연일 달구고 있습니다. 대구, 밀양과 함께 합천은 전형적인 내륙지방의 특성상 무척이나 더워서 전국 일기 예보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도라지꽃이 예쁘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도라지 줄기는 키를 한껏 세운 채, 바람 따라 같은 쪽으로 쏠리면서 그 정점에 흰색과 보라색 꽃들을 마치 묶어놓은 보자기를 펼치듯이 열어 보였습니다. 그 열린 꽃 속에서 흰색과 보라색의 나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6월 26일, 마침내 장마가 합천을 덮었습니다. 장마의 기운이 천지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가운데, 경남 합천의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는 6월 27일, 또 하나의 아름다운 만남을 꽃처럼 열었습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1. 배우의 시작 인사
ⓒ 정일관
공연 창작 집단 극단 <뛰다>에서 원경고등학교 학생들을 찾아와 박지선 작, 배요섭 연출의 창작극 <햄릿이야기>을 도라지꽃이 피어난 화단 옆 운동장에서 공연하였기 때문입니다. 극단 <뛰다>는 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배우들이 모여서 구성한 극단으로 문화관광부의 후원을 받아 전국을 돌며 찾아가는 문화예술공연을 펼치는 곳으로, 올해는 6월 중에 대안학교를 순회하며 청소년들에게 연극의 재미와 창의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2. 배우들의 등장
ⓒ 정일관
이미 6월 22일에는 청주의 양업고등학교, 6월 23일에는 천안의 한마음고등학교를 거쳐 왔고, 6월 27일에 합천의 원경고등학교를 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경고등학교 이후엔 6월 28일 산청 간디학교, 29일엔 산청 지리산고등학교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연하는 시간대가 모두 저녁 7시 30분이고, 그 장소도 비가 오지 않는 한 운동장 한 구석을 활용하여, 시골에 터를 잡고 있는 대안학교의 자연을 그대로 하나의 무대로 열어놓았는데, 그것은 극단 <뛰다>가 "자연친화적인 연극", 또는 "재활용 연극"을 선언하며 "연극 작업의 형태에 자연의 재활용, 혹은 순환의 원리를 직접 적용시키려는 것"이라고 한 나름의 정신을 실현하는 행위였습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3. 발단
ⓒ 정일관
극단 <뛰다>는 또한 극단 이름과 같이 관객들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문화로부터 소외 받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공연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어, 연극을 단지 선택된 사람들만의 향유물이 아님을 보여주겠다는 당찬 포부를 품음으로써, 먼 벽지의 대안학교까지도 마다 않고 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문화적으로 소외된 곳이 많습니다.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고급의 문화 행사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대안학교 학생들에게 찾아오는 문화 행사는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문화관광부의 발상 또한 칭찬할 만합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4. 다시 햄릿을 살려내고
ⓒ 정일관
극단 <뛰다> 단원들은 오후 2시에 원경고등학교에 도착하여 마침 장마 구름이 비껴간 땡볕에서 3시간에 걸쳐 무대를 설치하였습니다. 조명기를 설치하고, 줄을 대어 무대를 표시하고, 음향 기구들을 세밀하게 점검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소도구들도 꼼꼼히 챙기며 아이들을 맞아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윽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던 아이들이 7시 30분이 되자 모두 모여서 지정된 자리에 앉았고, 간단한 극단 대표의 인사말과 연극 관람과 관련된 안내를 하고 나서 연극은 시작되었습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5. 배우들의 열연
ⓒ 정일관
<햄릿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인 <햄릿>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그 진행 과정과 내용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는 영혼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3명의 광대들이 등장하여, 햄릿과 그 주변 인물들의 장례를 치르던 중에 햄릿의 수첩을 발견하고는, 그들의 비극적인 삶의 과정들을 그 3명의 광대들이 돌아가면서 연기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한 원경고등학교 아이들
ⓒ 정일관
그러나 이 <햄릿이야기>에는 <햄릿>처럼 완전히 비장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익살스러운 골계미도 갖추고 있으며, 격을 갖춘 무대보다도 마당극의 열린 공간 속에서 이루어내는 발랄함과 비감함, 슬픔과 우스꽝스러움이 다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극 중간 중간에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는 코믹하면서도 가벼운 터치를 하여 비극적인 삶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 같았습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다국적 퍼큐션의 앙상블이 이루어내는 음향 효과도 연기자들의 연기를 살려내며 연극에 몰입하게 하였습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6.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 정일관
그리고 이 <햄릿이야기> 에는 많은 소도구가 사용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수레는 때로 마차가 되기도 하고, 침실이 되기도 하고, 쉼터나 의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몸을 감추는 장막도 되기도 하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수레가 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무대 장치로 변환하면서 마당의 열린 공간을 효과적으로 의미 지우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 왕과 왕비, 그리고 시종의 가면, 죽은 햄릿과 그의 연인 오필리어의 해골, 흐늘거리는 의상 등의 소도구들을 연기자들이 번갈아 가며 사용하면서 3명의 연기자들만으로도 그 전체의 전개를 원활히 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7. 배우들의 연기도 깊어간다.
ⓒ 정일관
이와 같이 작가와 연출의 창의성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햄릿이야기>는 무려 1시간 45분을 배우들이 연기하여, 어둑한 저녁 7시 30분에 시작된 연극이 9시 15분에야 마칠 수 있었는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연기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연기함으로써 관람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뜻 깊은 경험을 안겨주었습니다. 학생들은 날이 저물자 달려들기 시작한 모기에게 시달리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연극 공연을 놓치지 않았고,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 연극 <햄릿이야기> 8. 왕과 왕비의 가면을 쓰고. 소도구들의 아름다운 변신
ⓒ 정일관
극단 <뛰다>의 연극 작품 <햄릿이야기>는 대안학교 원경고등학교의 한 여름 밤을 더욱 깊게 하였습니다. 밤을 이용한 이번 야외 연극 공연은 또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안학교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기획으로, 문화 소외 지역에서 '문화 즐기기'를 지향하는 원경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정서적인 충족감을 안겨 주었으며, 다른 대안학교 학생들에게도 그러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과 함께. 밤은 깊어졌지만 마음은 환하다.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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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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