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7월이다. 이제 피 냄새 나는 봄은 다 가고 본격적인 여름이다. 만물이 싱그럽게 소생하는 계절인 봄을 두고 꽃향기가 아니라 피 냄새 나는 봄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주요 사건들이 4월에서 6월까지, 즉 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4ㆍ19 혁명, 5ㆍ16 군사 쿠데타,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6ㆍ10 민중항쟁, 6ㆍ25 전쟁. 그래서 우리의 산하에 피어나는 봄꽃에는 피 냄새가 난다. 더러는 진달래꽃처럼 온몸으로 붉은 피를 토해내기도 한다. 봄의 끝자락에 피어난 아카시아 꽃향기조차도 비릿한 피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봄꽃들도 다 떨어졌고 피 비린내 나는 그 끔찍한 사건들도 20년 이상 묵은 옛날 일이 되었으니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딱지 앉은 해묵은 상처 건드려서 괜한 부스럼 만들지 말고 다가오는 여름을 신나게 놀아볼 궁리나 하자고 꼬드기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눈부신 태양의 계절 여름이 겨울의 추위와 쌓인 눈을 녹여낸 봄이 있어서 가능한 것처럼, 그 옛날 피 흘린 역사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을 수가 없다. 과거는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끌어내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현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일로, 또한 아무 전후맥락 없이 이어지는 고리타분한 연대기 정도쯤으로만 여기게 된 것은 아마도 중ㆍ고등학교 시절에 교과서로 배운 따분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역사 공부의 영향이 크리라.

교실에서 배운 그 역사에서는 지배자나 위인들이 주인공이어서 지금 현재의 우리 자신과의 연결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또한 그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들도 우리에게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시험 준비를 위한 암기의 대상일 뿐이었다. 역사는 결코 '내' 문제가 아니었으며 '지금'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렇게 역사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대학생이 되어서 조금은 달라졌지만 한 번도 제대로 역사를 공부한 적이 없었으니 고등학교 때와 오십보백보의 형국이었다. 한국사의 경우에는 여러 책을 잡다하게 읽으면서 중ㆍ고등학교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역사의 흐름과 세부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세계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내가 그 안개 속에서 비로소 길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그 때로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난 최근에 이르러서였다. 영국의 진보적 사회운동가 크리스 하먼이 심혈을 기울여 쓴 노작(勞作) <민중의 세계사>는 나의 세계사에 깃들인 짙은 안개를 걷어준 한 줄기 햇빛이었다.

2.

▲ 책 표지
ⓒ 도서출판 책갈피
<민중의 세계사>는 문명 이후만을 따진다고 해도 5천 년을 훨씬 넘어서는 인류의 오랜 역사를 800쪽이 조금 안 되는 한 권의 책에 담아내고 있다. 그것도 유럽과 북미 위주로 세계사를 서술하고 있는 다른 많은 세계사 책들과는 달리 아시아와 남미 그리고 거칠게나마 아프리카의 역사까지도 다루고 있으니 그 시간적ㆍ공간적 압축이 놀라울 정도이다.

그런데도 그 놀라운 압축이 가져올 수도 있는 역사의 단절이나 균열이나 왜곡이 <민중의 세계사>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 크리스 하먼이 굳게 발 딛고 서 있는 역사관의 투철함에서 비롯된다. 책의 표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역사관이란 바로 칼 마르크스의 역사관이다.

"역사의 일반적 경향에 대한 한 가지 통찰을 제공한 것은 칼 마르크스였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협동해야만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먹고사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할 때마다 인간들 사이의 더 넓은 관계도 바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생산력'의 변화는 '생산관계'의 변화를 수반하며, 생산관계의 변화는 마침내 사회관계 전체를 바꿔놓는다."(18∼19쪽)

칼 마르크스가 요약한 이런 역사 해석의 방법을 세계사에 적용하게 될 때, 왕이나 장군이나 위인들 대신에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한 민중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된다. 민중들이야말로 생산을 담당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역사상의 많은 사건과 변화들도 서로 전후맥락이 이어지고 연결되는 체계로 재조직된다. 처음에는 책의 두께만을 보고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지만 막상 책을 펼쳐 읽어 나가는 동안에는 전혀 지루하거나 딴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이렇게 논리적이고도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세계사를 엮어낸 저자의 탁월한 솜씨 때문이었다.

<민중의 세계사>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그 세계사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가 얼마나 한쪽으로만 편향되어 있으며 또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여러 고대문명 중에서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문명이었다고 흔히들 생각하고 있는 로마 문명에 대해서, "한 각도에서만 보면 로마 문명은 분명 인상적이다.……그러나 로마 제국의 문명 그 자체는 인류의 먹고사는 능력이나 축적된 과학 지식과 문화적 성과의 창고에 보탠 것이 거의 없었다"고 크리스 하먼은 혹평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까지도 존속했던 노예제도가 흔히들 알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인종간의 타고난 반감이라는 인간 본성, 즉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노예제도에서 인종차별이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여러 역사적 사실들과 문헌 기록을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다.

크리스 하먼은 노예제뿐만 아니라 전쟁, 착취, 여성 억압 등과 같은 인류 역사의 중요한 특징들 역시 어떤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예컨대, 인간은 원래 공격적이고 탐욕스럽고 경쟁적인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본성은 역사 발전의 산물이지 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거대한 정치ㆍ경제ㆍ이데올로기적 전투를 통하여 새로운 인간 본성이 낡은 인간 본성을 대체해 나가듯이 우리가 지금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라는 사회 체제도 영원한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 자본주의는 고작 3∼4백 년밖에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이기에 앞으로도 이러한 사회운영 방식이 계속 존재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실패가 아니라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인 국가계획경제라는 방법의 실패였음이 분명한 이상, 우리는 사회주의가 역사의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믿기 어렵지만 부인할 수도 없는 통계들―이를테면, 1990년대 말에는 3백 48명의 억만장자들이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었다, 1960년대 말에는 가장 부유한 20퍼센트와 가장 가난한 20퍼센트의 소득 격차가 30대 1이었지만 1990년에는 60대 1, 1998년에는 74대 1이 됐다, 1980년에 미국의 3백대 기업 최고 경영자들이 벌어들인 수입은 일반 생산직 노동자 평균 수입의 29배였으나 1990년이 되면 그 격차는 93배로 뛰었다―을 생각해 볼 때, 자본주의가 현재와 같은 병들고 추악한 모습으로 오래 지속되기란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약 한 세기 전인 1915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자본주의의 대야만을 목격하면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남긴 비장한 글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게 다가온다.

"…우리 앞에 놓인 전율스러운 선택은 바로 이것이다. 제국주의가 승리해 모든 문화가 파괴되고 고대 로마처럼 인구 격감, 황폐화, 그리고 퇴보로 이어지는 입 벌린 무덤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에 맞서 의식적으로 싸우는 국제 노동자 계급의 승리를 택할 것인가.……이것은 세계사적 딜레마이며, 필연적으로 다가올 그 선택의 균형추는 지금도 떨리고 있다.……전 인류와 문화의 미래가 바로 그 선택에 달려 있다."(768∼769쪽)

3.

18년 전인 1987년, 연세대생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6월 9일 경찰의 직격탄에 맞았고 여러 날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학생들과 넥타이부대들이 주축이 되었던 6월 민중항쟁은 7월 9일 그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노협, 민주노총을 거쳐 국회에까지 노동자들을 진출시킨 민주노동당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니 4월에서 6월까지 피 냄새 나는 봄이 다 지나갔으니, 이제 역사는 뒷전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4월과 6월 사이에 일어났던 그 옛일들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또 '지금'과는 아무 상관없는 옛일이 아니냐고 어찌 반문할 수 있겠는가.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장한 글을 빌려 우리의 선택을 촉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민중의 세계사(A People's History of the World) 

ㅇ 지은이 : 크리스 하먼 (Chris Harman)
ㅇ 옮긴이 : 천경록
ㅇ 펴낸곳 : 도서출판 책갈피
ㅇ 펴낸때 : 2004년 11월 15일 초판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책갈피(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