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멀리서 보기에는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서출지
멀리서 보기에는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서출지 ⓒ 권미강
경주의 서출지는 7월 중순부터 연꽃을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곳이다. 경주의 남산자락과 주변을 감싸안은 배롱나무. 거기에 이요당(二樂堂)까지 곁들여진 풍광은 그야말로 한여름 더위를 눈빛으로 씻어낼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니 말이다.

지난해 8월 초, 입추 전 연꽃이 가장 만발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서출지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힘있게 진흙을 밟고 선 연꽃의 자태며 하늘 향해 넓게 벌린 연잎의 환한 모습, 이요당의 고즈넉함. 연꽃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린 고추잠자리의 날갯짓까지 참 아름다웠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더욱 애절하게 기다렸고 7월에 접어들자마자 좀 이른 감은 있었지만 시간을 내어 애인을 보러 가듯 서출지를 찾았다. 그런데 아뿔사! 불과 1년만에 곱던 애인의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고 맥없고 축 늘어진, 병색이 완연한 모습만 있었다.

지난 해에 비해 꽃이 빨리 피고 꽃봉우리도 훨씬 작아 보였다.
지난 해에 비해 꽃이 빨리 피고 꽃봉우리도 훨씬 작아 보였다. ⓒ 권미강
하늘로 향하던 연잎은 왠일인지 하나같이 비스듬히 등을 지고 있었고 연꽃 또한 봉우리 색깔이 제 색보다 검어 보였으며 핀 연꽃도 힘없어 보였다. 활짝 핀 연꽃은 마지막 잎이 다할 때까지도 힘을 잃지 않고 줄기에 붙어 있는데 맥없이 겨우 붙어 있는 듯했다.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보이는 연밥도 지난해 보다 그 크기가 훨씬 작아보였다.

어떤 봉우리는 피기도 전에 죽어갔고 너무 빨리 져버린 연꽃에는 작은 연밥이 달려있다.
어떤 봉우리는 피기도 전에 죽어갔고 너무 빨리 져버린 연꽃에는 작은 연밥이 달려있다. ⓒ 권미강
서출지는 분명 변해 있었다. 그 궁금증은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아도 쉽게 풀 수 있었다. 바로 서출지 주변에 흉물수럽게 박힌 조명등 때문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약 50m 정도 됨직한 높이의 기둥에 붙은 3개의 조명등이 서너개 둘러져 서출지를 비추고 있었고 수초 사이에도 핫도그 모양의 조명등이 설치돼 있었다.

불빛을 받은 서출지 전경. 불빛을 받은 연꽃들이 잠이나 잘까
불빛을 받은 서출지 전경. 불빛을 받은 연꽃들이 잠이나 잘까 ⓒ 권미강
이요당을 둘러싼 조명등도 10여개 정도 보였고 배롱나무와 소나무 등 서출지를 둘러싼 나무들에게도 조명등은 무자비하게 빛을 비추고 있었는데 어떤 소나무에는 5~6개의 조명등이 고문관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배롱나무를 비추는 조명등은 아예 땅에 박아서 옆을 걸어 갈라치면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배롱나무 아래에는 직사광선처럼 조명등이 설치돼 있다.
배롱나무 아래에는 직사광선처럼 조명등이 설치돼 있다. ⓒ 권미강
그 모습에 기가 탁 막혔다. '도대체 서출지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서출지를 산책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 진위를 물어보았더니 경주시에서 '야간 볼거리 제공'을 위해 조명을 설치했다며 처음엔 환해서 좋아했는데 불빛으로 온통 모기와 날파리들이 날아들어 지금은 별로라고 했다. 처음엔 저녁 8시에 불을 켜서 새볔까지 밝혀놓더니 지금은 밤 12시면 소등을 한다고 했다. 그래도 이 어려울 때 그 전기세가 얼마냐며 한 주민은 볼멘 소리를 한다.

연잎들이 불빛을 등지고 있다. 환한 불빛이 싫은게다.
연잎들이 불빛을 등지고 있다. 환한 불빛이 싫은게다. ⓒ 권미강
조명등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많이 오더냐고 물으니 "원래 연꽃 필 때면 이 정도는 오지요. 헌데 뭐든 은은해야지 이렇게 확하니 불 밝히면 연꽃이 잠이 나 자겠어. 그러니 힘이 없어 보이지"하고 혀를 끌끌 찬다.

힘 빠진 걸음으로 서출지 한 바퀴를 도는데 황소개구리 소리가 징그럽게 귀를 타고 들어온다. 그 소리가 조명등 설치해 놓고 보기 좋다며 자축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아 소름이 돋았다.

무자비하게 서출지를 비추는 조명등. 마치 포로수용소의 감시용 불빛 같다.
무자비하게 서출지를 비추는 조명등. 마치 포로수용소의 감시용 불빛 같다. ⓒ 권미강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서출지의 밤은 아름다웠었다. 용장사터에서 탑신의 그림자를 만들던 달이, 삼릉골을 비추고 삼존불의 미소를 머금었던 달이 서출지의 연꽃에 내려앉으면 이요당의 지붕에는 흰 달가루가 뿌려졌고 소나무 가지는 부끄럽게 반짝거렸었다.

그래도 연꽃은 제 힘을 다해 꽃을 피우고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연꽃은 제 힘을 다해 꽃을 피우고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 권미강
하지만 환해진 문명의 이기 속에서 남산자락을 타고 내리는 달빛은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이것도 세월의 탓일까. 곧이어 경주 남산에도 등산로를 따라 조명등을 설치한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영광 속에 남산의 부처님들은 밤잠 못자고 강요된 축제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유네스코에 서한이라도 보내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도로 반납할테니 평온한 밤을 맞이하고 싶다고 할는지도 모른다.

소나무를 포위병처럼 감싸고 있는 조명등
소나무를 포위병처럼 감싸고 있는 조명등 ⓒ 권미강
내친 김에 반월성과 계림, 동부사적지와 노서고분군에 서린 신라사람들도 더 이상 환해서 편히 지낼 수가 없겠노라고 박하사탕의 주인공처럼 '나 돌아갈래' 외쳐댈지도 모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구경왔던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는데 나는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눈부신 듯 얼굴을 찌푸린 연꽃들이, 불빛이 뜨겁다고 몸을 비꼬며 도망치듯 하는 나무들의 아우성이 귀에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꽃이 빨리 시들어버렸다. 맥없이 줄기에 붙어있는 연꽃잎. 보기가 안쓰럽다.
꽃이 빨리 시들어버렸다. 맥없이 줄기에 붙어있는 연꽃잎. 보기가 안쓰럽다. ⓒ 권미강
그 아우성에 귀를 막고 하늘을 보니 서출지의 달은 없었다. 다만 테니스코트 같은 환한 조명등만 야만스럽게 비쳐지고 있었다. 서출지의 달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불현듯 한 시인의 시가 사라져버린 서출지의 달처럼 기억의 틈을 비집고 떠올랐다.

다시, 서출지

이종암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못의 아가리 위로 저 연꽃은 왜 피는지
그냥 못 둑에 서서 입만 벌어지다
다들 돌아간다

천 년 묵은 이 연꽃의 비밀을
나는 말해야만 한다
천년 사랑의 비밀 문서가 내장되어 저리 연꽃이 피는
書出, 池의 속사정을 나는 끝내 말해야 한다

막막한 뻘흙의 층을 지나 어둔 물 속의
계단을 밟고 초록의 세상 위로 고개 내민
연꽃은 사랑의 비밀 문서다
저것 때문에
못 둑의 늙은 배롱나무에서도
석 달 열흘 불꽃은 타오르는 것인가
비밀 문서가 세상에 나온 오늘
연꽃에 멱살 붙들린 서출지,

난리 났다고 물 속 억머구리 구르륵 꾸륵 울고
나 몰라라 저녁 해는 서둘러 제 길 떠나고
못의 아가리 주변을 따라 널브러져 있는
들꽃들은 초록으로 빨강으로 문서를 숨기려
저 야단들이다 물위 노랑어리연도 고개 쳐들고

사랑의 비밀 문서가 확 펼쳐진, 오늘
저 난리들 속에서

덧붙이는 글 | 경주는 달의 고장이라고 불립니다. 반월성과 함월산, 월지, 월명대사 등은 왜 경주가 달의 고장이자 신화의 고장인지 잘 말해줍니다. 경주는 고즈넉한 곳입니다. 삼국유사와  설화가 신라 천년의 신비를 담고 있는 곳입니다. 달빛기행으로 그런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조명등을 설치한다면 경주의 신화는 깨져 버리게 됩니다. 저는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경주가 경주답지 않고 다른 도시처럼 환해진다면 그것은 이미 경주가 아닙니다. 경주의 매력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시 신라의 달밤을 느낄 수 있는 경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조명등은 청순한 얼굴에 진한 화장을 한거와 같습니다. 천박한 화장은 이미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조명을 밝혀놓은 유적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경주의 제 모습이 자꾸만 그리워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상식을 가지고 사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