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가의 형제들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형제의 난'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은 두산가의 2남인 두산 박용오 회장과 3남인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 5남 두산그룹 박용만 부회장 등 3명이다. 이밖에 몇 명의 형제들과 관련자들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외형적으로는 지난 18일 박용오 회장이 일선에서 '아름답게' 물러나면서 3남 박용성 회장에 경영권 바통을 넘겨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박용오 회장측이 21일 검찰에 제출한 진정서에 따르면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과 두산그룹 박용만 부회장이 위장계열사와 분식회계를 통해 17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진정서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이 위장계열사를 만들어 각각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박용만 부회장이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박용성 회장의 큰 아들)와 함께 미국 위스콘신에 '뉴스라 팍'이라는 회사를 세워 800억원대의 자금을 해외로 밀반출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뿐 아니라 박용성 회장이 과실로 부도가 난 일경개발의 175억원 가량 손실분을 (주)두산기업에 넘겼다가 (주)두산기업이 부도 위기를 맞자 두산산업개발에 강제 합병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박용만 부회장은 두산그룹 계열사인 '엔 세이퍼'에 친구들인 SK그룹과 삼양사 오너들의 돈을 투자시켰다가 100억원 정도 손실을 보게 되자 두산 계열사가 이 회사를 80억원에 매입해 손실을 대신 갚아줬다는 것이다.
진정서에 따르면 두산의 계열사 가운데 두산중공업은 뉴스라 팍에 239억원, 엔 세이퍼에 50억원 등 290억원 가까운 돈을 비자금 조성에 투입했으며 2004년 창원지검에서 조사한 200억대의 분식회계(두산 매카텍에 두산중공업의 우량 자산을 떠넘겨 배임 혐의로 회사 임원이 처벌받은 사건)까지 합치면 500억에 가까운 자산을 날렸다는 것이다.
진정서에 담긴 위장계열사는 주류관련사인 (주)태백, 주방가구 회사인 (주)넵스와 두산그룹 경비용역업체인 동현엔지니어링 등이다. 이 가운데 (주)넵스는 두산가 6남인 박용욱씨가 대표이사로 맡고 있다.
결과적으로 두산가 6남 가운데 박용오 회장을 제외한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 3남 박용성 회장, 5남 박용만 부회장, 6남 박용욱 넵스 대표이사 (4남 박용현은 서울대 의대교수)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사태가 확산되자, 두산그룹측은 "박용오 회장의 반발은 선친의 공동소유,공동경영 원칙을 위배하는 행동이자 모럴헤저드"라며 "박용오 회장의 퇴출을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두산그룹은 발빠르게 22일 오전 (주)두산과 두산산업개발에서 긴급이사회를 개최 박용오 대표이사 회장의 해임안과 함께 박정원(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부회장 선임건도 통과시켰다. 박용오 회장 퇴출 공식 수순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봉건적 지배 구조가 화 불렀다"
이번 형제의 난으로 두산그룹의 뒤틀린 순환출자구조도 도마 위에 올랐다. 두산그룹측은 박용오 회장과 장남인 박정원(전 두산산업개발 상무)씨가 두산산업개발을 요구했지만 가족들이 이를 거부하자 "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용오 회장이 두산산업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던 이유는 두산산업개발이 (주)두산의 지분 22.8%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주)두산은 두산중공업(41%)의, 두산중공업은 두산산업개발(30%)의 최대주주로 이어지는 출자순환고리가 자리하고 있다.
박용오 회장은 두산산업개발을 차지할 경우 다른 기업의 지배가 용이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 형제들은 이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04년 12월 말 발표한 '출자구조 매트릭스'에 따르면 두산그룹의 총수와 친인척 지분이 4.95%로 그룹지배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봉건적인 지배구조가 화를 불렀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본부는 논평을 통해 "두산그룹 총수 형제의 난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주주 및 기업구성원의 공동재산인 회사가 마치 가족의 사유재산인양 오인되고 있으며, 경영권 분란이 주주총회, 이사회 구조를 무시한 채 가족회의에서 결정되는 등 전근대적인 가족경영 독점 체제를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검찰이 22일 수사 의사를 밝힘에 따라 두산가 형제의 난은 쉽게 진정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진정서 내용이 검찰 수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두산가가 입을 도덕적 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재계의 스피커'를 자처하면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박용성 회장이나 공동 경영의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했던 두산가는 이번 사건으로 망신살이 뻗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