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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도청과 연정, 6자회담 관련 뉴스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상황인데도 <조선일보>는 다른 의제를 던졌다. <조선일보>가 새로 제시한 의제는 ‘광복’이다.
<조선일보>는 오늘부터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란 제목의 기획 연재물을 싣기 시작했다.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숨 가쁜 길을 달려온” ‘그해 8월’ 청년들의 증언을 듣는 시리즈다.
올해는 인생으로 치면 한 갑자를 돌아 환갑을 맞는 광복 60주년 기념 해이다. 그래서 ‘손주에게 들려주는’ 기획을 잡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선일보>의 선수를 친 기획은 ‘발 빠르다’고 평가할 만하다. ….
하지만 유의해서 봐야 하는 대목이 있다. <조선일보>는 ‘그해 8월 청년들’로부터 듣고자 하는 증언을 “8.15광복부터 6.25전쟁까지 격동의 현장”으로 한정했다. ‘광복’이란 두 글자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친일’은 일단 ‘열외’ 조치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가 발족한 후 처음 맞는 광복절인데도 ‘친일’을 ‘열외’시킨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광복’과 ‘친일’을 패키지로 묶는 기획을 60년간 ‘우려먹은’ 진부한 아이템으로 본다면 얼마든지 각도를 달리해 접근할 수 있다. 그건 <조선일보>가 맘껏 향유해야 하는 편집권에 속하는 문제다.
문제는 <조선일보>의 기획 의도다. ‘8.15광복부터 6.25전쟁까지 격동의 현장’ 재연 장면에 담고자 하는 메시지가 뭐냐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일보>는 ‘그해 8월 청년들’을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숨 가쁜 길을 달려온 그들”로 규정했다. 다시 말해 ‘건국・산업화・민주화’의 논리로 ‘8.15광복부터 6.25전쟁까지’를 짚어보겠다는 뜻이다.
<조선일보>의 기획 의도는 다른 면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일보>는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광복 60년이 주는 의미’를 오피니언 면에 게재했는데 글의 핵심은 이것이다. “광복 60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동안 추구해온 산업화와 민주화가 결코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호기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지나간 미래’를 되짚어보겠다는 게 <조선일보>의 기획 의도인 셈인데, 이 대목에서 몇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하나. <조선일보>가 ‘그해 8월 청년들’로부터 듣고자 하는 ‘8.15광복부터 6.25전쟁까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대결구도로 설명될 수 없는 시기다. 오히려 좌 대 우, 친일 대 반일, 자주 대 사대 등의 대립구도가 극심했던 기간이다. 당시의 상황과 관점에서 역사를 봐야 한다는 역사학 기초이론에 근거한다면 아귀가 잘 맞지 않는 틀을 사용하려는 셈이다.
더구나 기획 연재물의 취지가 ‘손주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면 손주들의 수준에 맞으면서도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먼저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숨 가쁜 길을 달려온’ 할아버지들의 ‘지나간 미래’ 보다는 광복 투쟁을 미완으로 끝낸 할아버지들의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알려주는 게 순리 아니었을까?
둘. <조선일보>의 기획이 신문 지면을 벗어나 광장에 나갈 경우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궁금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는 11일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명단을 일괄 발표할 계획이다. <경향신문> 등의 보도에 따르면 이 명단에 <조선일보>의 사주였던 방응모 씨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친일인사명단에 포함될 것이란 보도가 나오고 있다.
친일인사 명단에 실제로 이들의 이름이 포함된다면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빚어질 것은 자명하며, 논란의 핵심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가 될 것임도 불을 보듯 뻔하다. 관동군 박정희가 아니라 대통령 박정희가 논란의 소재가 되는 순간 ‘사실 규명’은 ‘공과 평가’로 전환되고 결론은 유보될 것이다.
방응모씨에 대한 논란 역시 이 궤도를 따라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8.15광복부터 6.25전쟁까지’로 회고 기간을 제한하게 되면 방응모씨에 대한 논란은 부역자 범주에서 건국 참여자 또는 피랍자 범주로 전환된다.
<조선일보>가 이런 궁금증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할지는 알 수 없다. 오늘 게재된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 첫편, 김국주 광복회장의 증언에선 그에 대한 답이 없다. 오히려 우리 민족 스스로 광복을 달성하지 못한 노(老) 광복투사의 회한을 절실하게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의 답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사 명단이 발표되고 연재물이 하나 둘 쌓이면서 퍼즐 맞추듯 조금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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