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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을 다녀온 후(상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읍내에 돌아와 함양 군청 옆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도서관이 어디 있느냐고, 몇몇 아이들이 열심히 설명을 해댑니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있는 곳이 학교 앞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학교 담장은 아무리 봐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 나와 놀고 있는 것이었고요. 알고 봤더니 군청 부속건물인 줄 알았던 곳이 바로 초등학교였던 것입니다. 함양 초등학교입니다.

▲ 유럽의 대학들을 보면 작은 도시 한가운데 여러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 많다. 함양 초등학교에는 차길 건너 우체국이, 대각선 지역에 커다란 정자 학사루가 있다. 학교는 마을과 벽 없이 소통하며 자란다.
ⓒ 박태신
학교 건물과 그 앞 작은 산책로를 지나면 바로 차길! 아! 도시 몇 군데 대학교에서 진행 중인 담장 없애기 사업이 이곳에서도 있었던 것일까 싶었습니다. 군청과 학교 건물 사이의 샛길로 들어서니 드디어 운동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맞은편도 담장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태엽이 탱탱하게 감긴 인형처럼 뛰어놉니다. 태엽이 풀릴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할 아이들... 산이 멀리 보이는, 담장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주변에 막힘이 없어 뛰어놀기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 잠시 있어 보았습니다. 제가 학교 건물을 찍고 있으니 한 남자 아이도 디지털 카메라로 그런 내 모습을 찍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버스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정여창 고택에 가려고 공용터미널에 갔습니다.

지방 소도시의 시내, 시외 버스터미널은 하나의 출발선상이 되곤 합니다. 숙박을 하며 머물 경우, 한 고장의 여러 장소를 이 곳을 거쳐 오고 가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버스 터미널에는 여러 번 오게 되고, 주변 동네도 익숙해지게 됩니다. 다음 코스와의 시간 안배도 하게 되고요. 사실 금방 머물다 가는 곳이고 낯선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 친숙해지기 어려운 곳인데 이런 곳을 잘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구하고, 차 시간도 알아 두고, 지도도 구하고, 잠시 TV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안동, 울진을 돌고 있었는데 그 다음 목적지인 동해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한국과 스페인 경기를 시청했습니다. 홍명보 선수가 승부차기를 마지막으로 성공하고 두 손 들고 뛰는 모습을 그때 보았습니다.

시골 버스 안 풍경은 도심의 그것과 사뭇 다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으시고 들고 내리는 짐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정류장에서 타거나 내릴 때 기사 아저씨들이 배려해 주시는 것은 물론입니다. 안면을 트고 지내는 것도 다반사구요.

작년 여름 때 제천에서 버스를 탔는데 손님이 저밖에 없어서 기사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방이 트인 녹색물결 사이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 정작 버스 운행은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말을 긴하게 들었습니다.

정여창 고택은 지곡면 개평마을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한적하고 잘 포장된 길을 걷습니다. 한 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들르지 않을 수 없지요.

작은 마을치고는 꽤 컸습니다. 알고 보니 통합된 학교였습니다. 지곡 초등학교로 불리다 배재 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1층 한 교실이 유치원이었습니다.

▲ 세종대왕 동상이 턱 하니 앉아 학교의 정신을 지키고 있다.
ⓒ 박태신
다른 한 교실에서 음악수업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창으로 살짝 보니 컴퓨터 모니터에 나온 악보를 보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없는 국악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 실용적인 목적 없이 노래를 배운다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

요즘 동사무소나 문화의 집 같은 곳에서 노래나 종이 공작 같은 취미 활동 강습이 많습니다. 자기가 만든 종이 작품을 보여주곤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갖게 하는 무언가가 필요할 것이고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무언가 취미에 빠져 사는 것은 현실과 이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연결시키는 행동입니다.

정작 본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학교 아이들은 지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 아이들의 이런 시간이 소중하게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욕심인지 모르지만 어른들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공부가 파할 즈음의 나른한 시간이었습니다. 넓은 운동장에서 바라본 학교 건물이 사랑스럽습니다. 2층의 기다란 건물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교실, 도서실, 보건실, 유치원...

마음에 들게도 세종대왕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 밑 이름 밑에 자음과 모음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요. 학교 바깥으로 고택과 야산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전부는 하늘. 마음이 푸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뒷문으로 들어와서 정문으로 나갑니다. 정문 앞 학교 게시판에서 특이한 내용을 발견합니다. 학년별로 학생 현황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유치원 10명, 1학년 8명, 2학년 10명...전부 52명이고 남학생 여학생 숫자가 똑같습니다. 시골학교치고 많다고 해야 하나 적다고 해야 하나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앙증맞기도 하고 소박해 보이고 정겹기까지 합니다. 이 정도 인원이면 아이들 세세한 사항까지 다 보살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 작은 학교, 이 아이들의 작은 인원수를 보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써도 되겠는지 모르겠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게시판.
ⓒ 박태신
이튿날 또 함양 시내를 둘러보았습니다. 함양 읍내에는 학교가 많습니다. 제가 본 것도 해도 초등학교 2곳, 중고등학교 2곳입니다.

산자락에 있는 함양 고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갑니다. 역시 담 없기는 마찬가지. 담이라고 해야 이웃한 학교(멀리서 보면 한 학교 같습니다)와의 울타리 정도. 높은 언덕에 자리잡았는데 오른쪽 끝에 새로 지어진 듯한 건물이 보여 다가갔습니다.

▲ 배 모양이 연상되기도, 다리 교각이 연상되기도 한다. 전통방식 설명으로 정면 7칸의 맞배지붕의 이층 구조라고 할까. 아참! 그러고 보니 함양에 많은 2층 누각을 닮았다. 다목적 강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박태신
다목적 강당. 외관이 시원하게 잘 지어졌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건물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건물을 접하면 낯설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땀을 흘리며 건물에 때를 묻힐수록 이 새 건물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풋내 나던 건물이 연륜이 쌓여 추억덩어리가 되는 그런 건물로 잘 자랐으면 합니다.

그 아래로 한적한 차길이 하나 나 있고 그 아래 위성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쉬는 시간인데 아이 몇이 복도에서 저를 발견하고 소리칩니다. 저도 학교 이름을 물어보았는데 몇 번 큰 소리 쳐도 제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소통하려 애쓰는 아이들이 귀엽습니다.

▲ 차도가 있어 좀 거리가 있었다. 저 창문 사이로 고개 내민 몇 아이들과 고함으로 대화를 했다. 함양에서는 학교 담도 투명하다.
ⓒ 박태신
앞으로도 여행지의 학교를 즐겨 찾아갈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자주 삭막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강화도에서는 밤별들을 보았고, 경춘선 신남역 근처에서는 정돈 잘 된 뒤뜰을 보았고, 정선 구절리에서는 유리창에 낙엽잎 코팅해 붙인 것을 보았고, 강진에서는 어린 시절 추억을 보았습니다. 기억을 갈무리하는 것, 되도록이면 아픈 추억은 접고 기분좋은 추억을 서랍에 모아두는 작업은 이렇게 학교 안에 들어가 보는 것으로도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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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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