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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다. 한국의 대학교 중에서 사회복지학과나 관련 학과가 없은 대학이 거의 없다. 그런데, 사회복지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낮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복지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에서 출발했다. 특히 부모가 없는 고아나 봉양해줄 자녀가 없는 노인이 가장 일차적인 대상이었다. 남편이 없는 과부나 아내가 없는 홀아비도 관심이 대상이었다. 스스로 자신을 돌보기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은 가족의 도리였고, 가족과 친족조차 돌보지 못한 사람을 이웃이나 사회가 책임을 진 것이 사회복지의 출발이다.

이웃돕기로 해결했던 일을 왜 복지단체나 국가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발적인 이웃돕기를 방치하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 중에서 일부는 중복해서 도움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은 누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지역에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졸지에 ‘고아’가 된 아동이 있다면, 국가는 그를 ‘소년소녀가장세대’로 지정하여 기초생활을 보장해줄 것이다. 학교와 교육청은 장학금을 주선해주고, 독지가들은 후원금을 주며, 사회복지관과 교회에서도 우선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부부싸움을 자주하다가 갈등을 견디지 못해 어머니가 가출하고 그후 아버지도 일하러 나간 후에 소식이 끊긴 가정의 아동은 끼니를 굶게 되어도 주변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 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공무원은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부모가 살아있기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하기 어렵다. 행정적으로 가난하다고 판정되지 않은 아동은 학교에서 결식아동으로 등록되기 어렵고, 더욱이 민간단체가 그 명단을 파악하여 도움을 주기는 더욱 어렵다.

부모가 장기간 없어서 체계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한 상황은 같아도, 공적 혹은 사적인 복지체계 속에서 소년소녀가장은 상당히 중복된 도움을 받고, 부모가 방임한 아동은 사회로부터도 방치되기 쉽다. 따라서, 자발적인 도움주기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꼭 맞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서 국가는 이들을 한 곳에 수용보호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6·25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오갈데 없는 고아를 모아서 고아원을 만들고, 자녀가 없어서 봉양을 받지 못한 어르신들을 모아서 양로원을 만들고,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부양할 형편이 안된 장애인을 모아서 재활원을 설립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는 이들에게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제공하는 수준에 그쳤다. 경제형편이 나아지면서 단순한 수용보호가 아닌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나아가서 최근에는 최적의 생활을 지향하고 있다.

최근 복지수요자가 늘어나면서 한국의 사회복지도 크게 바뀌고 있다. 무엇보다도 복지는 “무료” 혹은 “공짜”라는 생각이 바뀌고, “실비” 혹은 “유료”복지란 인식이 늘어나고 있다. 예컨대 현재 한국인 중에서 65세 이상 노인은 400만명이 넘는데, 양로원, 요양원 등 노인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노인은 2만여명에 불과하다. 전체 노인중에서 1%도 미치지 못한 노인만 주거복지 혹은 의료복지를 받는 셈이다. 노인복지를 무료로만 제공해서는 수많은 노인이 복지서비스를 받을 수 없기에 노인과 그 가족의 부담능력에 따라서 유료 혹은 실비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

또한, 복지수요자의 욕구가 매우 다양하기에 서비스의 내용도 다변화되고 있다. 예컨대, 노인의 연령, 성별, 건강정도, 일상생활을 하는 정도, 거주지역 등에 따라서 복지서비스는 달라진다. 아픈 노인에게는 치료가 필요하지만, 건강한 노인에게는 예방서비스가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복지는 무료에서 유료와 실비로 확장되고, 서비스의 내용도 의식주의 제공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화복지로 달라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복지의 중심은 사회복지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바뀐다. 사회복지는 복지시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과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지역복지이고 생활복지이다. 복지개념이 이렇게 바뀔 때 불자와 불교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불교계가 사회복지에 눈을 번쩍 떠야 한다. 불교계는 오랫동안 수행과 복지를 함께 구현해 왔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서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바로 복지의 실천이다. 중생를 잘 제도하고 중생이 잘 살게 하는 것은 불교의 이상이다.

그런데, 불교의 사찰이 주민이 사는 주택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재가복지 혹은 지역복지를 실천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교회가 아파트단지마다 몇 개씩 생기고 성당이 동단위로 생길 때도 사찰은 한 도시에 몇 개의 포교당을 설치하는데 그쳤다. 교회와 성당마다 선교원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선교를 할 때 사찰은 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일요법회를 하는데 그쳤다. 이제 한국의 사찰은 주민들이 사는 곳에 포교원을 짓고, 복지관을 만들어서 사회복지를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당분간 포교원과 복지관을 건립하는 것이 어렵다면, 사찰에서 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가까운 지역의 푸드뱅크를 통해서 재가노인복지센터의 어르신들과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과 나누어 먹을 수도 있다. 전남 곡성에 있는 성륜사는 일주일에 세 번씩 제사음식을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에게 주고 있다. 부모의 보살핌을 잘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사찰의 음식은 더 없는 영양 간식이다. 사찰은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고 있는 셈이다.

복지의 원리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다. 건강할 때 낸 건강보험료 덕택에 아플 때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치료를 받는 건강보험은 바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사례이다. 국민연금에 가입하여 젊었을 때 보험료를 열심히 내고 늙어서 노령연금을 받는 것도 바로 되로 주고 말고 받는 복지이다. 이처럼 사회복지는 생활능력이 있을 때 조금씩 냈다가 늙고 병들었을 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제도이기도하다. 복지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서 복지의 대상이 되기고 하고 복지의 제공자가 될 수 있다.

그럼, 젊었을 때도 생활능력이 변변하지 못한 실직자나 노숙인의 복지는 누가 챙길 것인가? 나이는 젊지만 생활능력이 낮거나 소득보다는 지출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는 누가 챙길 것인가? 복지의 시각으로 보면, 스스로 노력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다. 사회복지가 아무리 발전해도 품앗이나 계와 같은 자조집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증거이다.

모든 불자는 평소에 복전을 쌓는다. 불자는 사찰을 방문할 때 부처님 앞에는 ‘복전함’에 시주한다. 복을 짓는 마음을 시주로 표현하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복을 짓는 것은 선행을 하고, 자비를 베풀며, 자원봉사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불교계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복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불교는 기독교나 천주교에 비교할 때, 대학교의 수와 수준에서 더욱 노력해야 한다. 스님과 재가불자를 위한 대학교육을 크게 강화시키고, 불교복지를 연구하여 정체성을 모색하며, 불교복지교육을 대상별 수준별로 실시해야 한다.

불교의 생활양식은 곧 사회복지와 통한다. 만행은 이웃이 다른 이웃을 도울 기회를 주는 것이고, 발우공양은 나눔과 상생의 생활을 실천하는 일이다. 온국민이 발우공양만 제대로 하면 음식물쓰레기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 있다.

불교적 생활양식을 시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 바로 복지교육이다. 현대사회에서 물질의 빈곤보다 정신의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계비가 아니라 마음을 번뇌를 해결할 수 있는 깨달음의 계기이다. 인터넷에 중독된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는 컴퓨터가 아니라 인터넷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마음수련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명산대첩에는 사찰이 있다. 모든 사찰에는 스님과 재가불자가 있다. 사찰에는 불자와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찾아와서 무료로 공양한다. 음식을 나누고 “차나 한잔 나눕시다”에서 불교복지는 시작될 수 있다. 사찰을 도심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인터넷으로 불교의 정신을 시민들과 나누기는 어렵지 않다. 물질의 복지를 넘어서 마음의 복지를 실천할 때, 불교복지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사찰과 스님, 재가불자가 힘을 모아서 불교복지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불교복지를 더욱 나눌 때이다. 이 땅에 불국토를 이루는 것,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열어가는 것은 불자의 꿈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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