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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농원 전경
ⓒ 인권위 김윤섭
전북 남원의 전망대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남원시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센병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오른손을 당당하게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표정이 밝았다. 혹시나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초면의 나를 오히려 그가 먼저 거리낌 없이 속시원하게 맞아 주었다.

“한센인 중에서 나는 병의 후유증도 약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이 정말 많기 때문에 사실은 자격미달이다”라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경증에 불과하더라도 이미 주홍글씨처럼 한 번 한센인으로 낙인찍힌 그에게 우리 사회는 냉대와 편견으로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최광현씨, 그의 지난한 삶과 소록도 간호사 출신의 아내와 가꾼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힐끗힐끗 성춘향과 이몽룡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광한루를 내려다보았다. 한센인이던 한하운 선생의 시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이 말해 주듯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던 한센인의 비애감을 새삼 알 것도 같다.

그는 자신을 당당히 내세우면서도 얼굴 사진을 찍거나 아내와 아이들의 인적사항을 밝히는 것을 꺼렸다. 자신과 아내가 지금껏 당해온 것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행여 아이들에게까지 사회적 편견이라는 깊은 상처가 대물림되는 것이 걱정된다고 했다. 신생농원 그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옥수수를 먹으며, 돼지 사료를 주며, 돼지 똥을 치우며 그의 힘겨운 인생유전의 편린들을 엿보았다.

최씨는 1961년 충북 보은군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6세 때 아버지를 잃고, 또 11세 때 어머니를 잃을 무렵 설상가상으로 한센병을 앓기 시작했다. 오른손잡이인 그에게 병증이 나타나 글씨를 쓸 수도 없었지만, 순식간에 고아가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가난과 더불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도 못해 그저 주는 밥이나 먹는 ‘새끼머슴살이’를 1년 정도 하다가 13세 때 가출했다. 그러나 이미 오른손에 병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공장 같은 곳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당시까지도 자신은 그것이 한센병인지 몰랐다고 한다.

서울의 영등포역이나 청량리역, 인천의 제물포 등에서 16세 때까지 노숙자 생활을 했다. 말이 노숙자지 사실은 녹십자혈액원에 피를 파는 ‘매혈자’로 살았다. 그러나 매혈도 중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시름시름 죽어가는 노숙 매혈자들의 진심 어린 충고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며 정신을 차렸다.

그 무렵 고향인 충북 보은에 큰 수해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수해복구 현장으로 가서 막일을 시작했다. 충북 옥천의 댐과 도로건설 공사에도 참여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우다 17세 때부터 21세까지 청주의 제빵공장에서 4년간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1월 21일, 소록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먼저 소록도에 들어간 동생을 면회하러 갔다가 면회 도중에 “당신도 입원하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조직검사 결과 양성반응이 나왔으니 그의 나이 만 20세 때의 일이다.

소록도 원생이 3000명에 이르던 시절, 소록도에서는 인력이 모자라 간호양성소를 운영했는데, 지금의 아내도 이 양성소 출신이다. 처음엔 그저 아내에게 우편물을 전해주거나 함께 커피를 마시는 정도였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서서히 가까워지긴 했으나, 간호사와 환자라는 선을 분명히 하고 만날 수밖에 없었다.

주말이면 신병동인 녹색리로 아내가 놀러오곤 했다. 나이 차이는 불과 세 살이었지만 아내는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아내에게서 주말에 광주로 한번 놀러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마침내 감시나 질시의 눈초리가 없는 광주에서 자유롭게 만난 그들은 영화 <오델로>를 보는 등 난생 처음 ‘데이트’를 즐겼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오면서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의 친구가 이를 부모에게 알렸고, 부모는 ‘더 가까워지기 전에 인연의 끈을 끊어야겠다’며 1986년에 아내를 광주보훈병원으로 이직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소록도에서는 드러내놓고 사랑을 표현할 수도 없었지만, 광주보훈병원으로 간 후 오히려 섬에서보다 자유로워졌다. 자주는 못 만났지만 그래도 광주에서 만나면 차라리 편했다.

소록도를 떠나 정착촌으로

한센병은 어쩔 수 없는 가난의 질병이었다. 몸은 건강했지만 일할 수도, 일할 곳도 없었다. 그는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에 마음도 몸도 이미 소록도화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소록도를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1988년부터 전국 30여 군데의 정착촌을 다녀봤으나 모두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결국은 아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벌교의 외서정착촌을 선택했다. 어렵사리 빚을 내 집을 구했지만 이후 주머니엔 달랑 8만원만 남았다.

▲ 돼지를 키우는 모습
ⓒ 인권위 김윤섭
친구에게서 얻은 새끼 밴 돼지 한 마리로 정착촌생활을 시작했다. 조합 가입도 하고, 막일을 가리지 않고 삽질을 하다 보니 상처가 심한 오른손엔 한센병의 흔적보다 삽질의 굳은살이 더 심하게 박혔다. 아내는 어머니에게 목포의 언니집에 간다고 둘러대면서 외서정착촌을 찾곤 했다. 그러다가 혼자 애쓰며 사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그해 6월엔 아예 정착촌에 들어와 버렸다. 돈도, 빚도 모르던 철부지였지만 아내는 사랑에서만큼은 단호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그해 6월 25일로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노발대발한 아내의 어머니와 외삼촌이 “딸을 내놓으라”며 수시로 들이닥쳤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산으로 줄행랑을 치곤 했다. 아내의 어머니는 가족회의를 열고 “만약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부터 가족이 아니다”고 선포했다.

최씨는 그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비용은 60만원, 그러고도 몇 만원 남았다. 교회에서 점심을 내놓았으며, 교육자인 큰동서가 아내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끝내 다른 가족은 나타나지 않고, 소록도의 환우들과 직원들, 그리고 광주보훈병원의 직원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가장 축하해 주어야 할 소록도의 몇몇 직원들과 환우들의 경멸과 시기에 찬 눈초리가 가슴을 후벼 파기도 했다. 당시 한센병 병력자와 간호사의 결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불문율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 결혼 10주년 기념반지
ⓒ 인권위 김윤섭
최씨는 화장실도 없는 방 한 칸에 돼지우리가 맞붙어 있는 집에서 가난했지만 행복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평생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임신한 아내에게 천추의 한을 남겨줄 뻔도 했다. 막일을 가리지 않고 일하던 그가 트럭에서 사료를 내리는 일을 하다가 신발이 밧줄에 걸리는 바람에 거꾸로 떨어진 것이다. 모두들 죽은 줄 알았다. 이틀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너무나 놀란 아내는 오래지 않아 조산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했다. 그때까지도 장모는 끝내 오지 않았다. 수중에는 단돈 750원, 미역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며, 아이가 5개월 될 무렵 정관수술을 받았다. 단종수술을 받으면 15만원이라는 거금이 나온다는 이유였다.

정착촌, 육지 속의 소록도

아마 아내와 아이가 아니었다면 다혈적이고 직선적인 그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농장 집행부와 기득권 때문에 갈등을 빚었고, 쫓겨날 위기도 여러 번 맞았다. 그동안 서서히 농장도 자리를 잡아가고, 처가를 찾아가 절을 해도 받지를 않던 장모도 5년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외서 한동농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닭 1500마리, 돼지 200두를 키울 정도로 사업은 커졌지만 오히려 빚은 2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주암호가 건설되면서 정착촌이 이주하게 되는데, 그는 농원장으로서 동분서주하며 정부와의 협상을 주도해 세대당 최소 2억5000만원의 보상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도 보상을 받았지만 빚을 갚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사정이 이렇자 주민들이 총회를 열어 자기 것 챙기지 않고 마을을 위해 앞장선 그에게 십시일반 돈을 마련해 주었다. 그 돈으로 순천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정착촌이 아닌 곳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순천의 지체장애인협회의 일을 보기도 하며 사회자립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한번 낙인찍힌 한센인이 설 곳은 여전히 이 세상에 없었다. 한센인이라는 소문이 주변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번지면서 협회 일도 그만둬야 했으며, 그와 가족은 죄인처럼 쫓겨나야 했다.

2001년 7월 30일, 야반도주하듯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벌목 공사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내는 이곳에서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가정의 어려움으로 맡겨진 아이들을 돌보는 ‘늘사랑 복지센터’에 자원봉사를 나갔다. 자원봉사 활동으로 한 살배기 딸아이를 며칠간 데려다 키우던 아내는 그만 그 아이에게 정이 들었다. 어려운 입양의 관문을 통과해 그 여자아이를 키울 수 있었으니 어여쁜 가족이 하나 늘어난 것 이상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벌목공사 일로 받는 월급은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고민 끝에 2002년 남원의 신생농원으로 이주했다. 아파트를 처분한 돈으로 단독주택을 짓고 돼지를 키우며 열심히 살다 보니 서서히 생활도 안정을 찾아갔다. 최씨는 지금 한빛복지협회의 선도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전국 한센인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고 있다.

▲ 동네에서 일하는 최광현씨
ⓒ 인권위 김윤섭
중앙회에서 월급도 나오고, 바깥일을 볼 때는 아내가 모돈 60여 마리를 돌보기도 하니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경제생활도 한층 윤택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도 구김 없이 자라주고, 입양한 딸이 유치원을 다니며 재롱을 피우니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다. 아들은 어느새 그의 체격을 능가하는 데다 그를 닮아서인지 운동신경이 뛰어나 15세 때 태권도 4단을 땄다. 남원시장기에서 최우수상, 전남도지사기에서 은메달을 딸 정도로 운동에 재능을 보였다.

최씨 부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과 딸이 한센인의 굴레를 대물림 받지 않는 것이다. 단지 병력자의 아들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편견과 멸시에 시달리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헤어지기 전에 꼭 할 말이 있다며 각오한 듯 입을 열었다.

“단지 한번 병을 앓았다는 게 죄인가요. 앞으로 한센인특별법이 제정되기를 바랍니다. 소록도에서만 차별과 편견이 있다고 보는 것은 오산이지요. 전국의 모든 한센인들은 여전히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일생을 그들과 함께 할 겁니다. 정부에서 부추긴 자활정착촌은 모두 육지 속의 소록도가 되었지요. 미감아 분교 등 편견의 온상이 사실 정착촌입니다. 소록도에서는 혼자 당하지만 정착촌에서는 온 가족이 당합니다. 그것이 더 힘들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특별법 제정으로 한센인의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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