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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있다. 이름은 안나 에메스. 그녀의 닫힌 기억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범죄조직과 정치권력의 폭력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들어간다. 그 폭력의 실체를 찾아나가는 작가의 치밀한 전개에 빠져들어 독자는 숨마저 가쁠 지경이지만 마음대로 책을 놓지 못한다. 재미있으니까.

▲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장편소설 <늑대의 제국> 앞표지
ⓒ 소담출판사
2003년에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소설(200만 부)로 기록된 소설, 프랑스 문학 역사상 최고 저작권료를 받고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된 소설, 세계 전역 30여 나라에서 번역 출판 작업중인 소설…. 바로 프랑스의 최고 스릴러 작가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넷째 자식으로 출산한 <늑대의 제국>이다.

기억상실증을 앓는 그녀와 엽기 연쇄살인사건

사람이 기억을 못한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만취하여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앞뒤 상황은 다 생각나는데 하필 그것을 잃어버린 순간만 기억나지 않으니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 그런 것도 견디기 힘든 노릇인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슬픔은 드물 것이다.

안나 에메스는 바로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그것도 아주 특이한 기억상실증이다. 보통 일들은 기억하지만 이상하게도 가까운 자기 주변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남편까지 낯설게 느껴진다. 남편의 친구 에릭 아케르만 박사가 그 치료를 맡았지만 원인을 찾아내는 데 실패한다. 이어서 안나 에메스는 다른 정신과 의사 마틸드 빌크로를 만난다. 마틸드 빌로크는 그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독자는 그녀의 실체를 찾기 위해 이 소설에 숨죽이고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터키타운에서 엽기적 연쇄 살인사건이 터진다. 경찰청 수사부의 폴 네르토 팀장은 범행대상이 불법체류자인지라 피해자의 신원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고민한다. 그러다 찾아간 사람이 과거에 터키타운 수사를 맡았던 전설적인 퇴임 형사 장 루이 시페르. 잔인한 연쇄살인 뒤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은 무엇이며, 기억상실증을 앓는 안나 에메스에게는 어떤 폭력이 있었던 것인가?

폭력 구조 해부에서 스릴러 소설 탄생까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폭력조직 '회색 늑대'의 폭력 실체를 밝혀내는 <늑대의 제국>은 이처럼 두 가지 사건을 전개하여 소설 한 편을 그려나간다. "막바지에 하나로 조립되었을 때의 반전, 그리고 안나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의 반전이 매력"이라고 한국어판 편집자 방세화씨는 말했다. 또한 "시칠리아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 일본의 야쿠자, 터키의 보즈쿠르트 등, 기자 시절 취재를 통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력을 붙여 썼기 때문에 사실성이 돋보인다. 진실과 허구의 모자이크가 매력"이라고 했다.

"깨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찾으려는 여인 안나 에메스, 뇌를 연구하는 정체불명의 박사, 살을 깎고 뼈를 부수는 연쇄살인범,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경찰, 터키의 잔인한 범죄조직, 그리고 이들에 얽혀 있는 미스터리한 사건 전개… <늑대의 제국>은 복잡한 부품들로 구성된 정교한 시계 같은 소설입니다."

▲ <늑대의 제국> 뒤표지를 가득 채운 프랑스 스릴러의 거장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날카로운 면모
ⓒ 소담출판사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기자 시절 폭력의 구조를 해부하겠다는 생각으로 세계의 범죄 집단에 관해 조사하여 깨달은 것은 '이것들이 단순한 조직범죄 단체가 아니라 극우의 정치 이념을 가진 사이비 정치 집단이기도 하다는 사실'. 아마 이 깨달음이 없었다면 <늑대의 제국>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독서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인상 쓰게 될 소설

이 소설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평가는 더욱 찬사 일색이다.

'그야말로 마약과 같은 소설이다. 마약에 취한 듯이 따라가 보라. 당신은 식사도 건너뛰게 될 것이고, 자녀를 돌보는 일도 소홀히 하게 될 것이며, 독서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인상을 쓰게 될 것이다.' - <르 주르날 뒤 디망슈>
'전체가 악보처럼 빈틈없이 짜여져 있다. 거기에 할리우드 최고 걸작 영화의 리듬과 그리스 고전 비극의 장엄미를 갖추고 있다.' - <르 피가로>
'이 소설은 천둥처럼 우리를 뒤흔든다. 책을 읽다가 전기가 나간다면 손전등 불빛을 비춰서라도 끝까지 읽게 되는 작품이다.' - <르 파리지앵>
'뜨겁게, 설탕을 넣지 않고, 한 번에 마시는 터키 커피 같다.' - <마리 프랑스>


그러나 소설이 아무리 치밀하게 짜여지고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하더라도 옮긴이가 정교한 눈으로 따라잡지 못하면 그 긴장감을 무너뜨리고마는 중대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어판 <늑대의 제국>을 만나는 독자들은 안심해도 된다.

번역가의 작가 취재여행 따라잡기

<개미> <뇌> <나무>를 비롯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전작품을 이 땅에 소개하여 이미 치밀한 번역 솜씨를 과시한 바 있는 이세욱씨가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번역가의 노력도 만만치 않다. 이씨는 지난해 여름, 파리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무대를 두루 돌아보았다고 한다.

주인공들의 행로를 따라서 파리의 터키타운과 수많은 거리, 페르 랏셰즈 공동묘지,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연안의 무대들도 샅샅이 답사했던가 보다.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역자는 수도 없이 경탄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이씨는 고백했다.

발로 뛰는 소설가의 최대 작품과 발로 뛰는 번역가의 만남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번역서를 두 권 선사해 주었다. 남은 무더위를, 심장마저 서늘하게 할 <늑대의 제국> 읽기로 퇴치하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늑대의 제국>(전2권)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쓰고 이세욱 옮김/2005년 7월 25일 소담출판사 펴냄/225×143mm 각 296, 288쪽/책값 각권 8500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늑대의 제국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소담출판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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