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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RK'라고 새겨진 흰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들과의 첫 만남

▲ 터키 이즈미르공항에서부터 한 비행기를 타고 온 북한 유니버시아드 선수단 임원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 만남이 잦아질수록 이들의 미소 또한 이 사진 처럼 더욱 환해지리라 믿고 싶다.
ⓒ 김정은
2005년 8월 18일, 2005년 터키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리고 있는 이즈미르 공항.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카이세리로 비행기를 타고 터키의 동쪽으로 날아가 다시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린 나의 아시아 방면 터키여행의 마침표를 찍을 곳이다.

이스탄불로 되돌아가기 위해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하는 동안 갑자기 내 눈앞에 생경하지만 너무도 비슷한 모습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발장난을 치고 있는 천진난만한 북한 체조선수의 모습
ⓒ 김정은
하얀 색 트레이닝복 상의에 'DPRK'라는 검은색 국명 표시가 선명한 '북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이었다.

이렇게 해외에서 북한 사람들과 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처음이라 반가움에 뭔가 인사를 나누긴 해야 될 텐데 인사를 방해하는 왠지 모를 서먹한 분위기는 비행기 승강대로 가기 위한 버스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결국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바로 앞에 서 있는 어린 소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경기 끝나고 돌아가는 중인가요?"
"네."
"체조선수들인가 봐요?"
"네 맞습니다."

무뚝뚝한 몇 마디 대답을 던진 채 북한 체조선수들은 비행기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지만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함께 타고 오는 내내 나의 시선은 그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건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외국인들만이 법석대는 이국의 한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같은 색깔의 얼굴과 같은 색깔의 머리, 같은 말로 떠드는 사람들, 마치 거울을 본 듯 똑같은 모습의 일행들에게 어찌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갑자기 서로를 말없이 응시하던 남쪽의 가수와 북쪽의 무용수를 클로즈업한 모 회사 휴대폰광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은 북한 여자 체조선수. 사진 찍느라 정신이 팔려 이름 묻는 것을 잊어버린게 두고 두고 후회가 된다.
ⓒ 김정은
이렇게 남과 북의 어색했던 만남은 이스탄불 아타투르크 공항에서 짐을 찾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막힌 물꼬가 터지듯 갑작스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피하면서도 자기네들끼리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용기를 내서 함께 사진 찍을 것을 제의했다.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흔쾌히 수락했다. 수줍게 사진을 함께 찍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동안 미묘하게 흘렀던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너도 나도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했고 공항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선수단 임원에게 일행 중 한 명이 다가가 말을 붙였다.

"반갑습니다. 경기 끝나고 돌아가시는 길인가 보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 유니버시아드 경기 결과는 어땠나요?"
"뭐 금메달 하나 하고 은메달 몇 개 땄습네다. 그쪽은 관광 왔나봅네다?"

"네, 단체로 터키구경 왔습니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동포를 만나니 너무 반가워서요. 함께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뭐 나까지 찍습네까? 그럼 모두 같이 찍읍세다."

우연한 만남과 가슴 속에 따스하게 켜진 소망이란 촛불 하나

공항에서 5분여 동안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고 반가웠다는 인사를 건네며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길로 되돌아갔지만 지금 서울로 돌아와 사진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마음 속에 짧았던 그들과의 만남은 이번 8박 9일간의 터키여행 중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하나로 곱게 남아 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모여 이루어진 실낱같은 기적이 아닐까? 그러한 기적들이 모여 만남이 지속될수록 어색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느덧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여행도 일종의 우연과 우연이 모여 이루어진 기적 같은 만남이다. 내가 사는 곳과 사뭇 다른 공기와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고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자꾸만 부딪쳐 만나면 결국은 익숙해지고 친근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세계 속의 유일한 분단국가, 아직도 여행을 나가면 코리아보다는 사우스, 노우스코리아로 불리는 남과 북, 남과 북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한 글자의 접속사만 있을 뿐인데 접속사를 사이에 둔 둘의 관계는 그전보다 조금은 풀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어색하고 두렵기만하다. 처음 이즈미르 공항에서 북한 선수단을 우연히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우연한 이번 만남을 통해 내 가슴 속에 소망이라는 초 한 자루를 준비하려고 한다. 처음 만남은 어색했지만 만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공항에서 만난 그들처럼 서로에게 익숙해지리라는 믿음의 촛불을 말이다.

세상의 울타리 안쪽에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스쳐갈 만큼 짧았던 만남이기도 했지만
세상이 그어둔 선 위에서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쓸쓸하고 어둡던 내 가슴 한쪽에
소망이라는 초 한 자루를 준비합니다.
(이하 생략) - 이정하의 <내 가슴 한쪽에> 중에서


2005년 8월 13일 0시, 인천공항을 출발하면서 시작된 나의 터키여행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남북의 만남처럼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안고 시작되었다.

북,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선수단 49명 파견

▲ 유니버시아드 대회 체조 단체전 은메달리스트인 북한선수들과 함께

지난 12일(한국시간)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열린 전 세계 대학생들의 축제, 제 23회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12일간의 열전을 마치고 8월 22일 폐막식을 올렸다.

여행 중 터키는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F1 포뮬러 대회의 동시 개최로 여느 때보다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번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북한은 임원 24명, 선수 25명을 포함한 총 49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고 레슬링그레코로만형 55㎏급에서 리경일이 금메달을, 여자체조선수들이 단체전 은메달과 2단 평행봉 은메달(한정옥)을 차지하였으며, 그밖에도 홍인순, 최금희가 여자다이빙 10m플랫폼에서 각각 은메달을, 레슬링 자유형 66kg급에서 강금철이 동메달을 차지하였다. /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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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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