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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네거리 종교교회 현관 앞 돌 기념비에는 양주삼 총리사 기념교회라고 씌어있다.
ⓒ 뉴스앤조이 신철민
감리교를 빛낸 인물로 회자되는 양주삼 목사(1897-?).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솟은 웅장한 석조건물과 10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교회(최이우 목사)는 다름아닌 '양주삼 목사 기념교회'로 명명되고 있다.

그러나 기념 교회가 설 만큼 극도의 추앙을 받고 있는 양 목사는 실제 대표적인 친일 기독교 인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29일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 양 목사는 종교와 전쟁협력 양 부분에 이름이 올라있다.

양 목사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찬성한 것은 물론 1938년 12월 국내 기독교를 대표해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했으며, 일본의 태평양전쟁 찬양과 학도병 모집에 적극 나섰던 부끄러운 전력도 갖고 있다.

1943년 11월 8일 <매일신보>는 양 목사가 "드디어 반도 청년학도 제군에게도 무인으로서 출전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한없이 기뻐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양 목사는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열린 '미·영 타도' 좌담회에서 참가해 일제 태평양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양 목사는 물론 일제말 감리교단의 정필순·정춘수, 복음교단의 최태용, 성결교 이명직, 장로교단의 한경직·홍택기 등 각 교단의 요직에 있었던 인물들 모두 우리 민족과 교회 앞에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당사자들이다.

특히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일제 신사참배 정책에 순종하기 위해 일본 신 '미스 기바라'의 이름으로 한강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주의 종으로 헌신을 맹세한 성직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신앙적 훼절이었다.

또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교단 차원의 각종 행사는 1937년 이후 숱하게 이뤄졌다. 장로회는 1937~39년 동안 전승축하회 594회,무운장구기도회 9053회,국방헌금 158만여원,시국강연 1300여회 등을 개최해 일본을 도왔다.감리회도 교회 종 헌납과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 개소 등으로 일제를 지원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친일의 잔재는 기독교라고 해서 결코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교회가 대표적 친일 인사인 '양주삼 목사 기념교회'라는 사실은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상징한다.

친일 기독교 인사들은 해방 후에도 교단과 각종 기독교 기관에서 실권을 유지하는 등 여전히 기독교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성결교단의 친일 인사인 이명직 목사는 해방 후 서울신학교 학장으로 추대됐고 성결교 교단가를 작사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1959년 44회 장로회 총회 분열 후 예장통합측은 역시 친일 인사인 전필순 목사를 용납하고 그를 총회장에 추대했다.

양주삼 목사가 감리교에서 추앙되듯 이명직 전필순 목사 등은 성결교나 장로교단의 대부와 같은 위치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교단 내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광복 60년을 맞았지만 기독교의 오욕과 굴욕의 역사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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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글 쓰는 일로 먹고 산 적이 있고, 돈 벌어보려고 자영업자로 산 적도 있습니다. 요즘은 소소한 일상을 글로 표현하고 그걸 나누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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