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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앞둔 시골장 인심은 넉넉하다. 이번 명절도 여성들에게는 공포의 연휴가 될까.
추석을 앞둔 시골장 인심은 넉넉하다. 이번 명절도 여성들에게는 공포의 연휴가 될까. ⓒ 마동욱
"우리 아들이 생지(생김치)를 좋아하는데 한 2~3일 후에 담글까?"
"워메. 그 때 담그면 맛난 것 다 빠지지. 내일 담가 김치 냉장고에 바로 집어넣으소. 그나저나 아들 며느리 손지 다 오겠구만."
"우리 메누리는 와도 일 한나도 안해. 아기만 '염병하게' 보듬고 왔다 갔다 한당게. 뭐, 저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나. 지그 집에선 다 해 처먹음서 못한다고 지랄이니 할 말이 없제."

치아가 하나도 없으신 아흔 넘으신 시어머니가 열무쌈을 그렇게 잘 잡숫는다는 얘길 하는 걸 보면 노모를 모시고 살며 며느리를 본 젊은 시어머니였다. 반대편에 앉은 또 다른 젊은 할머니가 말을 받았다.

"우리 젊을 때는 일 무서운 줄 몰랐는데 요즘 젊은 아그들은 왜 그런지 몰러. 아이구, 아기 낳고 잘 살아 주는 것만도 장하지. 뭘 더 바라겠나."
"그럼 장하고 말고. 새끼 낳고 안 살겠다고 내빼불면 그게 더 큰일이제."

그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아그가 어리니까 지금은 내가 봐주지만 조금 크면 그 땐 어림도 없다. 뺀질뺀질 늙은 시엄씨만 부려먹으려는 수작을 내가 봐줄 줄 알고? 아하하하~ 젊은 것도 한 땐데 젊은 것이 편히 살아야제. 같이 고생하면 쓰간디."

나중엔 국물도 없다던 젊은 시어머니는 한바탕 웃음을 웃더니 슬그머니 철없는 며느리 편을 들었다. 그 양반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혼자 웃음을 참다 보니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주부들은 도시, 농촌 구분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환갑 넘긴 우리 어머니, 명절 스트레스 없을까?

부모 형제 모두 모여 우의를 다지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우리의 미풍양속 명절.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주부들을 위협하는 '명절 증후군'의 심각성이 신문 지면 하나를 덮을 만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어 버렸다.

차례 음식 준비에 유난히 정성을 기울이는 시어머니 극성에 파김치가 되는 며느리도 있을 것이요, 명절날 아침 예의상 돈 봉투만 살짝 들고 남편, 자식 대동하고 나타나는 밉살맞은 작은 동서를 때문에 열통 터지는 큰며느리도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리모콘 작동하듯 그 자리에 앉아 "술상 봐와라. 과일 내와라. 커피 타라" 동동거리는 마누라 쉴 새 없이 불러대는 남편까지 있으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시부모 앞에서 부부싸움을 할 수도 없고, 바쁜 와중에 구석으로 불러내 죽지 않을 만큼 패버릴 수도 없고. 그야말로 쌓이는 울화는 대책이 없을 것이다. 우리 집도 비슷하다. 달랑 외며느리 하나인 친정 엄마. 나는 결혼할 때까지 무려 30년 동안 명절 때면 도지는 우리 엄마의 '히스테리'를 보며 살았다.

추석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송편.
추석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송편. ⓒ 정현순
7남매의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에겐 손아래 동서가 셋이 있다. 그런데 작은 엄마들은 분가해 산다는 이유로 명절 차례상 준비에 소홀한 편이었다. 명절 1주일 전부터 음식 준비에 정신이 없는 큰동서 생각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명절 전날에야 간신히 서너 시간 때우다 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참 답답한 건 76세의 할머니가 된 지금도 우리 엄마의 명절 히스테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몸은 늙어도 마음만은 여전해 우리 엄마의 명절 준비는 그야말로 산해진미다. 차례상 음식에 갈비, 잡채, 묵까지 쒀야 '찍어 먹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양반이니까.

고집불통인 시어머니 때문에 환장하는 우리 올케. 당연히 명절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다. 즐거운 명절 날 우리 올케 표정에는 웃음이 없다. 일에 지쳐 같이 웃고 떠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는 며느리를 보는 엄마 역시 불만이 없지 않다.

"내가 다 준비해 놓은 것 하루 전날 와 조금 거드는 게 뭐 그리 힘드냐?"는 게 엄마 생각이다. 늙은 시어머니나 젊은 며느리나 똑같은 강도로 고통을 당하는 명절 스트레스. 옆에서 보는 나는 답답하기만 하다.

후손이 변하면 조상님도 변해야 한다

세상이 많이 변해 차례 음식을 상채로 배달하는 전문 요식업체가 성업 중이란다. 명절 연휴 어느 휴양지 콘도에서 배달된 차례상으로 절 두 자리 꾸벅하며 예를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니 명절 풍속도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본 데 없고 배운 데 없는 상것'들이라고 한탄하는 어르신들도 많다. 조상을 기리는 차례상을 '해도 너무 한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싫고 좋고를 떠나, 옳고 그름을 떠나 명절 풍속도에 대한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조상을 기리고 자신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는 명절 차례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는 젊은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가치관은 갈수록 퍼져 향후 10년 이내 주문한 차례상으로 명절을 치르는 게 보편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명절 황금 연휴를 이용해 국내, 국외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갈수록 활발해지는데 직장과 가사를 완벽하게 수행할 여건이 되는 여성 또한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주문 차례상, 정말 비난 받을 일일까?

올해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뜨겠지요.
올해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뜨겠지요. ⓒ 김민수
무엇보다 조상을 기리는 정성에 후손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릴 이유가 없다. 아버지, 아들 손자, 가족은 누구든 차례 음식 준비에 손을 거드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식구들이 둘러앉아 밤도 까고 부침개도 부치며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추억담도 이야기하며 송편 빚는 즐거움.

제사 흉은 보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각자의 가풍대로 조상을 기리는 방법이 존중된다는 것이다. 형편이 어려우면 그에 맞춰 따뜻한 진지 한 그릇, 나물 몇 접시 올려놓은들 어떠리. 형식에 상관없이 정성만 깃든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생각이다.

바쁜 일이 있거나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며느리에게 던지는 단 한마디.

"에미야, 내가 간단히 준비할 테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쉬어라. 내일 아침 차례 지내기 전까지 오면 되지 않겠니."

이런 시어머니를 모신 며느리는 반찬 몇 가지를 마련하더라도 정성스럽게 마련할 것이고 당연히 명절 스트레스에 크게 노출되지 않을 것이다.

주문 차례상. 도저히 차례를 준비할 상황이 아니라면 그 또한 얼마든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없는 며느리 눈높이에 맞출 줄 아는 멋진 시어머니 상은 이런 모습 아닐까?

"이번엔 형편이 그러니까 조상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차례 음식을 주문하자. 그런데 매년 조상님께 맛없는 외식만 시켜 드릴 수는 없지 않겠니? 내년엔 너하고 나하고 정성 들여 차례 음식 장만하자. 올 해 불효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말이야. 어때 괜찮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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