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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국의 문학 이야기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앞표지
ⓒ 이룸
전상국은 아마도 김유정과 황순원, 두 큰 작가에게서 영향을 모두 받은 대표적인 작가일 것이다. 그가 문학 이야기 책을 내었다.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등단 42년 동안 나름의 열정을 쏟아 부으며 걸어온 문학의 길 위에서 이삭 줍듯 편편이 정리한 글들'이다.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에서는 전상국 냄새가 나지만, 비단 그의 냄새만 나는 건 아니다. 김유정 냄새도 난다. 황순원 냄새도 난다. 그리고 전상국과 관련된 여러 사람 냄새도 난다. 사람 냄새 나는 수필, 이만큼 읽기 즐거운 책도 없다.

전상국의 형편없는 문장과 어휘력을 일깨워준 황순원

"술이 내 건강의 바로미터지. 열세 살 때 체증으로 해서 반 홉씩의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문학보다 더 빨리 시작한 셈이지. 술을 배워 술 얘기를 소설로 써서 그 원고료가 모두 술값이 된 거지."

누구의 말인가? 1980년 9월 정년퇴임 직후 제자인 전상국이 스승의 건강에 대해 물었을 때 황순원이 대답한 말이라고 한다. 오로지 '황순원 선생님이 계신다는 이유'로 경희대 국문학과에 들어간 전상국은, 대학생이 되어 처음 쓴 소설을 스승께 건넨 뒤 "잘 썼드구만"이라는 칭찬을 듣지만 고쳐야 할 것 또한 많았다.

그러나 자취방에 돌아와 흥분된 상태에서 원고를 펼쳐본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원고 곳곳이 선생님의 연필 글씨로 고쳐져 있었던 것이다.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 문장은 줄이 쳐져 있었고 적절치 않은 낱말 하나하나가 지적된 뒤 모두 다른 말로 고쳐져 있었다. 내 문장이나 어휘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 사건이었다.
-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168쪽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자기 이야기를 하여라"

세상에는 모여서 남의 얘기 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그 사람에 관한 좋은 얘기라면 모르되 약점을 잡아놓고 열심히 물어뜯는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매우 심각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사생활침해죄를 짓고 마는 경우가 발생하는데도 잘 모르고들 그런다.

황순원이 남겨준 교훈은 인상 깊다. 전상국은 '예로부터 술자리에서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안주로 올려놓고 씹는 맛이 큰 것인데, 선생님은 그 정도가 좀 심하다 싶으면 거침없이 제동을 거시곤 했다'고 고백했다. '무엇을 부정하기는 쉬워도 긍정하기는 어렵다고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일에 익숙해 있는' 전상국과 동료들에게 황순원은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남의 얘기, 특히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은 게야."
-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174쪽에서


그러고는 "작가는 남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참다운 작가"라고 곁들여 가르쳤다고 한다. 황순원 선생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에피소드다. 그런 자신의 스승을 전상국은 이렇게 찬미했다.

선생님은 절제된 간결한 문체에서부터 선생님의 삶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것이 그러한 자제와 연마의 미학으로 빚어지고 정리됨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이 시대의 큰 장인, 예술 혼의 화신이셨다.
-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175쪽에서


남북의 작가들이 얼굴을 마주한 건 성공적이었지만...

신경숙씨가 <한국일보>에 기행문을 썼고, 소설가인 박도 기자가 <오마이뉴스>에 입심 좋게 연재하고 있지만,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여했던 전상국도 기행문을 썼다.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속에 들어 있다.

묘향산에서 돌아와 보니 고려호텔 객실 침대 위에는 내가 빨아 널어놓은 내복이 곱게 개켜져 있었다. 함께 방을 쓴 김용만 작가는 내복을 그냥 벗어놓고 갔는데 그것마저 깨끗하게 빨아 개켜져 있었다. 그 아름다운 손길을 통해 순혈의 미풍양속을 만나는 감동이 자못 컸다.
-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216쪽에서


전상국은 이 기행문에서 '이번 양쪽 작가의 만남은 서로가 얼굴을 마주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성공적이라는 생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남한의 작가로서 지적해야 할 것을 빼놓지 않았다.

다만 민족작가대회 일정 중에 함께 돌아본 정해진 관광 코스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안내원들의 그 미소와 함께 계속 들어야 하는 동어반복의 언어들을 부담스러워하는 남 측의 작가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앞으로 북 측이 적어도 작가들과의 만남에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북쪽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준 갖가지 수준 높은 공연이나 그 규모가 엄청난 여러 개의 조형 구조물, 이를테면 소년궁전이나 주체탑 전승탑 또는 묘향산의 국제친선기념관 관람에는 생각하기에 따라 그 효과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해 주었으면 한다.
-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213쪽에서


전상국은?

1940년 강원도 홍천 출생. 경희대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1985년부터 2005년 현재까지 강원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김유정 문학촌 촌장이다.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집으로는 <바람난 마을>, < 하늘 아래 그 자리>, <우상의 눈물>, <아베의 가족>, <우리들의 날개>, <형벌의 집>,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사이코>, <온 생애의 한순간> 등이 있다. 이 밖에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 <김유정>, <우리가 보는 마지막 풍경>,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등의 저서가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한국문학상, 후광문학상, 이상문학상특별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유정의 소설 쓰기는 기법이 내용이고 내용이 곧 기법"

춘천에는 김유정역(구 신남역)도 있지만 김유정 문학관도 있다. 살기 바쁘다 보니 김유정역으로 바뀐 뒤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김유정 문학관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실은 내 고향이 김유정과 같은 강원도 춘천이다. 그것도 내가 갓난아기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성장해 온 효자동과 김유정의 고향인 실레마을과는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사이다.

나는 국민학생 때 방학이면 서울 창신동 벼랑 위에 있는 친척의 판잣집에 놀러 가곤 했는데, 직행버스나 완행버스를 타고 갈 때면 꼭 북한강 벼랑 끝에 세워져 있는 김유정 문인비를 바라보며 "소설가란 저렇게 위대한 거로구나"하고 감탄하곤 했다. 고등학생 때는 "작가는 모름지기 교만해야 한다"는 김유정에 대한 이상의 평가를 우러르며 문인의 꿈을 불태우기도 했다.

전상국은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의 '5부 김유정 그리고 강원문학'에서 '김유정 소설의 언어와 문체'에 대해 탐구하며, '당대 민초들의 열린 언어를 독특한 자기 체취로 선택하여 신명나게 능청을 떤 김유정의 소설 쓰기는 기법이 내용이고 내용이 곧 기법이 됨으로써 그 작품은 시대를 넘어서는 높은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하고 찬미했다.

"쓰는 일이 즐거워서 소설을 쓴다"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1부 왜 쓰는가'에서 '쓰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라고 소설 쓰는 이유를 힘차고 명백하게 밝힌 전상국. 그는 '3부 문학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대학생 때의 은사인 시인 조병화, <조선왕조 500년>(전48권)의 작가 신봉승, 고등학생 때의 은사인 시인 이희철,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시인 이승훈, 대학생 때 동기동창인 시인 이성부에 관하여 과거의 일화를 들어 꾸밈없이 말하고 있다.

그밖에 '2부 내 문학의 영토 지키기'와 '4부 책 읽는 즐거움'에서는 자신의 문학 세계와 타인의 문학 세계 사이를 넘나들며 깊이있는 사유의 숨소리를 명쾌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전상국 씀/2005년 8월 26일 이룸 펴냄/223×152mm(A5신) 368쪽/책값 1만1700원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 전상국의 문학 이야기

전상국 지음, 자음과모음(이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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