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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마을 입구.
두레마을 입구. ⓒ 정호갑

1997년 5월, 중국 길림성 옌지(延吉, 연길)시 의란진 연화동에 옌볜 두레마을이 생겨났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이 항일운동을 벌였던 본거지이며, 뒷산 너머에는 소설 <토지>의 주인공인 서희가 조준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난 뒤 훗날을 기약하며 찾은 고성촌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옌볜은 현실적으로는 중국 땅이지만 우리 역사, 겨레의 모습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옌볜에는 황폐화·공동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많은 조선족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두레마을은 중국의 환경문제와 3농(농촌, 농민, 농업) 해결에 일조해야겠다는 취지로 세워졌다.

1997년 5월, 김진흥 목사가 앞장 선 가운데 한국인 5명과 현지 일꾼 10명으로 시작된 이 사업은 9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 13명, 조선족 동포 40여명이 거주하는 녹색문명의 터전으로 변모했다.

2004년 이곳을 방문한 김지하 시인은 <생명공동체 운동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대화 담론>에서 연변 두레마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 이 같은 문명전환적 운동은 언제나 그 주체와 지역과 상황에 어떤 지속성을 지닌 전설이나 신화를 동반하는 법이다. 연화동촌의 장백산 두레마을에 도착하여 내 스스로 본 바로는 풍수에서 중요시하는 산곡간개활(山谷間開活)의 명당혈처(明堂穴處)로서 크고 새로운 운동의 근거지로서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거기에 항일민족 해방 운동의 근거지 중의 근거지라는 결정적 전설과 신화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가운데 줄임) - 이러한 지역적 배경은 21세기 생명사회(녹색사회, 순환사회)를 앞당기는 생명 운동, 에코(ECO)와 디지털(DIGITAL)이 이중적 교호 결합하면서 녹색문명을 촉발시키는 동북아의 그린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호조건을 갖추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 '에코폴리스'인가

두레마을 전경.
두레마을 전경. ⓒ 정호갑

두레마을 공동체의 근본 취지는 내적으로는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행복을 누리고, 외적으로는 대안사회의 싹을 전파하며 지역사회와 인류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두레마을은 농장의 기능 외에 국내외 동포들에게 개방돼 필요목적에 따라 농업훈련의 장으로, 체험학습의 장으로, 녹색문화를 배우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120만평의 두레마을의 부지 중 30만 평은 조선족 사회에 기증돼, 생태마을형 조선족 민들레촌으로 육성되고 있다.

옌볜 두레마을은 또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두레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인도적으로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옌볜 두레마을에서는 북한의 신의주와 나진선봉 지역에 고아원 식량 및 의류지원, 북고성 농장 지원 사업 및 묘목 보내기 운동, 북한 씨감자, 경운기 지원 사업 및 농기계 공장 건립 지원 사업을 해왔다.

특히 이들은 북한의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지속적인 가뭄과 홍수 때문에 북한의 식량자급이 힘들 것으로 보고 연변-북한을 잇는 '생명평화의 숲 프로젝트'를 통해 북한에 잣나무 묘목 보내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두레공동체운동 동북아본부 임진철 본부장은 "길게 보면 북녘 땅도 우리의 아들딸과 손자손녀들이 뛰어놀 곳인데 황폐해진 그곳을 예전의 금수강산으로 복구해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라고 이 사업의 의미를 밝혔다.

이렇게 진행되던 두레마을 사업은 7년 만인 2004년, 더 확장됐다. 동북아 한민족 문제를 연구, 실천하다 보니 동북아지역이 유럽연합처럼 지역 블록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그래서 나온 것이 '장백산 에코폴리스' 조성이었다. 생명평화 운동으로 상징되는 녹색운동을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옌볜 두레마을을 거점으로 하자는 것이다.

두레 에코폴리스 조감도.
두레 에코폴리스 조감도. ⓒ 정호갑
이 때부터 두레마을의 취지와 목적도 에코폴리스의 의미를 더한 산촌생태도시의 대안모델 창조, 푸른 연변 자치주 조성, 동북아 그린르네상스 운동의 거점 조성으로 확대됐다.

'연변 두레마을'이라는 이름도 '장백산 두레마을'로 바꾸었다. 명칭을 '백두산 두레마을'이라 하지 않고 '장백산 두레마을'이라고 한 것은 장백산이 동북아를 상징하기 때문이라 한다. 백두산하면 조선족과 한국, 북한의 고유 이름이지만, 장백산 하면 중국 만주족과 조선 민족 공동의 산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두레마을을 찾는 사람들

장백산 두레마을 캠프장.
장백산 두레마을 캠프장. ⓒ 정호갑
초창기, 교회 사람들을 중심으로 연 2천여 명이 방문하던 두레마을은 지난 2004년 8월 동북아 녹색경제대회를 기점으로 에코폴리스로 조성할 것을 천명한 뒤부터는 다양한 계층으로 방문자가 확대돼 연 4천여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현재 두레마을에는 300여명이 교육받으며 숙식할 수 있는 연수회관용 숙소 및 휴양 시설 그리고 문예창작기지와 그린캠프장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서 독립군 체험학교, 생태기행, 역사기행, 문학기행, 휴양휴식 등의 각종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내외의 수많은 심포지엄과 교육 연수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단체에서 연수와 휴양으로 이곳을 찾고 있다. 이러한 방문은 7, 8월에 집중되지만 봄가을인 5, 6월과 9, 10월에도 상당수가 찾는다.

장백산 두레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많이 사가지고 가는 것이 된장과 꿀이다. 두레마을 된장은 북경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 소문이 나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된장 맛의 비결을 묻자 이성한 장백산 두레마을 총무과장은 물과 공기가 그 비결이라고 전한다. 1급수의 물과 맑은 공기로 발효가 잘된다고 한다. 이곳의 꿀은 이물질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진짜 꿀이다.

장백산 두레마을의 미래

임진철 두레공동체운동 동북아본부장
임진철 두레공동체운동 동북아본부장 ⓒ 정호갑
공동체는 보통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역 촌락과 같은 자연적 공동체와 일정한 이념, 신념, 가치를 매개로하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형성된 계획 공동체(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키부츠, 모샤브공동체)로 구분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두레마을은 계획 공동체이다. 이러한 계획 공동체들은 기존 사회를 보다 바람직한 사회로 변혁시키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대안적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9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들이 꿈꾸어가고 있는 두레마을의 모습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임 본부장에 따르면 중국에는 국가기관과 민간기업만 존재할 뿐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체인 NGO나 비영리공익법인으로서의 NPO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사회가 NPO인 장백산 두레마을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장 등 농축 산업을 하는 외자기업의 법적형식을 가졌기 때문에 현지 사회는 두레마을을 외자기업으로 보는데 운영방식은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보니 이해가 쉽지 않은 게 당연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장기프로젝트를 거대한 수입원 없이 된장과 꿀의 판매수익금, 본부 지원금에만 의존하다 보니 아무래도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러나 향후 20여년에 걸쳐서 '산(産, 녹색산업기지)-학(學, 교육기지)-주(住, 주거단지)-휴(休, 휴양단지)'가 일체화된 에코폴리스(ECO-POLIS, 생태문명촌)를 건설하려는 두레마을 프로젝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임 본부장은 "북핵문제만 해결되면 옌볜 지역은 중국-북한-한국-러시아가 함께 어우러지는 '동북아의 홍콩지역'으로 변화 발전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그럴 경우 장백산 두레마을은 동북아 그린르네상스 운동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두레마을을 보며 백범 김구 선생의 '이제껏 이러한 일을 한 겨레가 없으니 우리가 하자'는 말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덧붙이는 글 | 연길 두레마을 사무소 : 86(중국 국가 번호)- 0433(연길 지역 번호)-291-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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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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