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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 호텔에서 바라본 묘향산
향산 호텔에서 바라본 묘향산 ⓒ 박도
남북간의 깊은 골

향산 호텔에 닿은 시간은 밤 9시 무렵이었다. 애초 계획시간보다 서너 시간 늦었다. 만폭동 등반 일정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중에 나눠준 일정표에도 "이 일정은 일부 변경이 가능한 것입니다"로 되어 있었다. 일부 회원들은 우리 집행부가 북측에 너무 일방으로 끌려 다니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손님이다. 어떻게 성사된 대회인가. 대부분 회원들은 하고 싶은 말을 자제하는 듯했다.

늦은 시간이어서 시장했다. 집행부는 방 배정에 앞서 곧장 식당으로 안내했다. 2층 구내식당에는 이미 저녁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조촐한 음식들이 깨끔하게 가득 놓여져 있었다. 평양에서도 그랬지만 북녘의 음식은 맛이 담박하고 산뜻하다.

특히 산채국 맛이 일품이라서 봉사하는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고비 고사리 곰치 두릅 버섯 등 다섯 가지 산나물이 들어갔다고 했다. 약간 씁쓸한 맛인데 음미할수록 깊이가 있었다. 그곳 특산물이라는 향어튀김도 맛보면서 아주 맛있게 밥그릇을 비웠다. 이번으로 북녘 땅을 다섯 차례 방문한다는 황석영 선생도 이번 음식이 가장 좋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묘향산에서 열린 환영음악회의 마지막 장면
묘향산에서 열린 환영음악회의 마지막 장면 ⓒ 박도
인민가수들이 몇 시간 전부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기에 식사 후 여장도 풀지 않은 채 곧장 호텔 별관 공연장으로 갔다. 이른 새벽(2시)에 일어난 데다가 백두산, 평양, 묘향산으로 옮겨 다녀서 몸이 여간 지치지 않았다. 거기다가 금세 밥을 먹은 뒤라 졸음이 쏟아졌다. 북녘 최정상 인민가수들이 나와서 귀에 익은 군밤타령 등 민요를 불렀지만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어서 뒷자리에서 꾸벅거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라 "금강산도 수면 후"였다. 한참 졸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에 번쩍 잠이 깼다. 벌써 공연의 마지막 곡이었다. 얼른 몸가짐을 추스르고는 카메라를 들고 앞자리로 가서 몇 장면 누르자 무대의 막이 내렸다.

공연이 끝나자 밤 11시 40분이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방을 배정받아 객실로 돌아와서 몸을 닦으려고 하는데 우리 5조 조장 오수연(소설)씨가 문을 두드렸다. 집행부의 전달로 언행, 특히 '말조심'을 극구 당부하고는 돌아갔다. 우리 회원들이 불쑥 내뱉는 말에 북측 집행부과 매우 불쾌해했던 모양이다. 이러다가는 대회가 중단될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새삼 남북간의 깊은 골을 느꼈다.

'배꼽 티'를 모르는 북녘 동포들

머리를 박박 깎은 젊은이들이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머리를 박박 깎은 젊은이들이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 박도
2005. 7. 24.

06:30, 답사여행을 잘하는 비결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 사실 몸이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다. 일어나자 몸이 가뿐하였다. 세면 뒤 옷을 차려 입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산세가 기묘하고 향이 좋아서 산 이름이 '묘향산'이라는 이 명산을 난생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안개에 덮인 산 계곡 언저리를 맴돌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머리를 박박 깎고 러닝셔츠만 입은 한 무리의 젊은이를 태운 트럭이 빠른 속도로 호텔 앞을 지나쳤다. 그들이 군인인지 죄수들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언행에 조심하라는 말에 주눅이 들어서 아침 산책으로 멀리 가지는 못하고 빤히 보이는 곳만 맴돌다가 식사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갔다.

아침 밥상 주 먹을거리는 남새속빵에 밥과 된장찌개였다. 남새속빵은 만두였는데 속에 고기대신 여러 나물을 다져넣은 것이다. 맛이 깨끔했다. 이번 남측 참가자는 총 110여 명이었는데 평소 익히 알고 지내던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초면이었다. 5박 6일은 친교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굳이 이런 큰 행사가 아니더라도 동호인끼리 일 년에 한 번씩 함께 단체 여행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조촐한 아침밥상
조촐한 아침밥상 ⓒ 박도
아침밥상에는 이가을(아동문학), 김창규(시), 신세훈(시), 박성훈(수필)씨 등과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밥상머리 얘기 주제는 남북간 문화 이질감이었다. 특히 언어의 이질감에 대한 염려가 컸는데 이대로 분단이 오래가면 다음 세대에는 대화가 원만치 못할 거라고 걱정이었다.

박성훈씨가 단적인 예화로 케도(KEDO) 현장에서 남북 근로자들이 난센스 퀴즈로 '참새시리즈'를 소개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섯 마리의 참새가 방탄복을 입고 전깃줄에 앉아서 노닥거리다가 포수들이 쏜 산탄총에 맞았다. 그런데 네 마리는 무사하고 한 마리만 땅에 떨어졌다. 왜, 그 참새만 떨어졌을까. 출제자의 정답은 '땅에 떨어진 참새는 배꼽 티를 입었기 때문이었다'였는데, 북측 근로자들은 배꼽 티를 '리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몇 남북 생활용어를 견주어 본다(괄호 안: 북한말).

진정제(가라앉힘약), 개숫물(가시물), 돌연사(갑작죽음), 횡당보도(건늠길), 명암(검밝기), 환기(공기갈이), 육교(구름다리), 볶음밥(기름밥), 튀김(튀기), 투피스(나뉜옷), 폭우(무더기비), 프라이팬(볶음판), 미소(볼웃음), 세탁소(빨래집), 팬티스타킹(양말바지), 화장실(위생실), 괜찮다(일없다)… .

우리는 조선사람입니다

향산 호텔 앞(필자)
향산 호텔 앞(필자) ⓒ 박도
일정대로라면 국제친선관과 묘향산 보현사 관람이었지만 집행부에서는 불거져 나온 문제를 봉합하고자 임시전체모임을 마련하였다. 간밤 공연장에서 전체모임을 가진 바, 집행위원 정도상, 방현석 두 사람이 나서서 그동안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살얼음을 딛는 마음" "국내 1000명이 움직이는 것보다 100명 움직이는 게 더 힘들다"라는 말로 읍소하면서 언행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한두 회원으로부터 "왜 북측에 일방으로 질질 끌려 다니느냐"는 질책도 있었지만, 원로 분들이 나서서 "우리는 손님으로 초대자의 의사를 따르는 게 미덕이다"고 설득하여, 큰 설전 없이 마무리되었다.

60년만의 만남이 일사천리로 움직이는 게 오히려 이상할 테다. 남과 북은 그동안 너무 다른 체제와 생활방식에 살았다.

일찍이 최인훈은 1960년대 초에 쓴 소설 <광장>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포로가 된 이명준이 송환을 앞두고 '남의 부패상', '북의 게으를 수도, 타락할 수도 없는 부자유한 사회'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제3국인 중립국을 선택하여 가다가 마침내 바다에 투신하는 그때(1960년대)나 오늘의 남북(2000년대)이 40여 년 동안 얼마나 더 큰 변화와 발전이 있는지 필자도 잘 모르겠다. 남의 부패는 얼마나 더 정화되었으며 북의 자유는 얼마나 더 신장되었는지 남과 북을 잘 아는 전문가에게 묻고 싶다.

만일 이 상태로 통일이 된다면 남쪽의 많은 신세대들은 북의 '부자유스러움'를 견디지 못할 듯하고, 북의 젊은이들은 남의 자유 분방한 체제에 적응치 못할 듯하다. 나는 이번 방북을 통하여 통일을 위해서는 서로가 변해야만 이룰 수 있고, 그래야만 통일 뒤에도 삐꺽거리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걸 확인하였다.

남과 북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더 나은 점은 받아들여야 통일을 이룰 수 있고, 그래야 통일 뒤에 잘 살 수가 있다. 그것은 남북 모두가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이룰 수 있는 바로, 그런 길로 이끄는 것은 남북의 지도자 몫일 게다.

'우리는 형제'(오른쪽 서강호 버스기사)
'우리는 형제'(오른쪽 서강호 버스기사) ⓒ 박도
모임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자 서강호(43) 버스기사와 심기섭 안내원, 그리고 다른 한 안내원이 돌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마침 남측의 한 젊은 여성작가가 지나가자 그들은 그 미모에 감탄하면서도 '맞불질(남성과 마주 담배를 태우는 것)'과 다른 일부 회원의 머리 염색을 '리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최근 남녘에서 군사정권이 물러난 뒤 남녀평등 사상과 여성들의 인권신장이 커지고 민주화로 일어난 현상이라면서 "남자도 태우는데 여자들도 같이 태우는 게 뭐가 나쁘냐?"고 했다. 그러자 그는 북조선에서는 공화국 창건과 더불어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면서, 남녀평등은 정치적 사회적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지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가 똑같이 하는 게 아니라고 우겼다.

또 나는 머리염색은 한때의 유행으로. 자기의 개성을 살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하자,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리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들(공산주의자)이 나보다 더 보수적인데 놀랐다.

"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검은 머리를 양키들처럼 물들입니까? 우리는 조선사람입네다."

심기섭 안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항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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